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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고부이씨. 세효려(古阜李氏. 世孝閭)

백산(栢山) 2025. 4. 18. 05:00

 

고부이씨. 세효려(古阜李氏. 世孝閭)

 

 

 

*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799-1.

 

 

 

 

고부이씨 세효려(古阜李氏 世孝閭)는 조선 시대에 고부이씨 효자 이승간이승간의 아들 이광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효자 이승간본관은 고부(古阜), 자는 직경(直卿), 호는 석호(石湖)이다.

 

 

고려조 첨지 정승(僉知 政丞) 이경조(李敬祖)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를 지낸 이삭(李朔), 증조할아버지는 역시 시강원 사서를 지낸 이원소(李元蘇)이며, 할아버지 시직(司直)을 지낸 이수(李粹)이다.

 

 

아버지부산첨사(釜山僉使)를 지낸 이철동(李哲仝)이고, 어머니수원백씨(水原白氏)설서(說書)백구계(白九啓)의 딸이다.

 

 

이승간1485(성종 16) 부안 도방산(道防山)사저(私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유희를 좋아하지 않고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정성껏 효도함이 하늘이 내린 것과 같고 기개와 도량이 범인과 달라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8세 때아버지가 종기로 매우 위독하자 이승간이 말하기를, 옛적에 오기(吳起)라는 사람이 스스로 환부를 빤 일이 있으니 빨아야 낫는다 하며 스스로 빨기를 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효과를 얻으니, 소문을 들은 자들이 그 기특한 생각과 정성에 감탄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어버이에게 손수 드리고, 질병에는 분()을 맛보아 증세를 살폈다. 두루 베풀고 봉양함이 한결같으니 이웃 마을에서 모두 존경(尊敬)하여 복종(服從)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틈틈이 학문에도 힘을 다하여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학업하였으며, 그 배움이 오직 자연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굳게 약속하며, 심각하고 깊이 생각하고 명백히 판단하는 공부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계맹(李繼孟)과 도의로 사귀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그 학식이 깊어 당세에 짝이 드물다고 말하였으며, 학문과 행실을 겸비한 성덕군자(盛德君子)라 칭송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명예가 더 드러나 여러 번의 천거로 조정에서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에 제수하였으나 이승간부모 봉양하기 위해 벼슬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도방산 밑에 집을 지어 부모의 음식, 의복의 수발을 하는 틈에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니 학도(學徒)가 끊임없이 모여들어 성취(成就)하는 이가 많았다.

 

 

중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으며, 장사 후에는 3 여묘(廬墓)하며 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 외에는 동문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매서운 추위 한더위에도 질대(絰帶)를 풀지 않았고, 3년상을 마친 후에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며 새벽에는 반드시 참배하였다. 편모 봉양을 늙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 실수로 집 안에 불이 나서 침실까지 번졌는데, 어머니 백부인은 나이 84혼미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승간 또한 나이 63 늙고 쇠약하여 힘 쓸 수가 없어, 다만 몸으로 어머니를 감싸 보호하니 모자가 함께 사망하였다.

 

이승간행적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광춘은 1505(연산군 11)이승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서(仁序)이다. 타고난 바탕과 성품이 높아 어려서 가정의 가르침을 익혔으며, 학문이 돈독하여 별좌(別坐)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집에 있어 오직를 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영리 영달뜻을 두지 않고 강도(講道)하며 지냈다. 

 

 

이광춘이 마침 출타하였다가 급히 돌아와 보니 집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내당에 불이 붙어 아버지 화염을 무릅쓰고 할머니구하러 들어갔는데 불이 문을 막았다.

 

 

이에 이광춘사나운 불길을 뚫고 들어가 아버지 업어 내고 할머니를 업고 나왔으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광춘온몸 불에 데여 성한 곳이 없었고,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때 현감인 양희(梁喜)구장(具狀)하여 조정에 올리니 부자에게 정려가 내려졌고, 이광춘의 행적 삼강록에 수록하였다.

 

 

1707(숙종 33)부안의 유림들이 청계서원에 향사하였다. 이승간, 이광춘 부자의 묘고부이씨 재실 원모재(遠慕齋)[부안군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 부근에 있다.

 

 

1556(명종 11)정려를 받아 건립하였다. 1826(순조 26)에 중수하였고, 1968 다시 중수하였으며, 1997중수 및 단청을 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2,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길이는 정면이 각 200이고, 측면이 각 138이다. 기둥은 자연석을 다듬은 기초석 위에 원형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나무 기둥을 얹었다. 담장은 붉은 벽돌로 둘렀으며 철제문을 달았다.

 

 

출입문 2개로 되어 있으며, 우측 출입문 위에는 세효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 안에는 효자선공감직장이승간지려(孝子繕工監直長李承幹之閭) 현판과 효자별좌이광춘지려(孝子別坐李光春之閭) 현판이 있다.

 

 

이외에 양세정려기(兩世旌閭記) 1826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지은 고부이씨세효정려중수기(古阜李氏世孝旌閭重修記)’ 10대손 진사 이원곤(李源坤)이 지은 정려중수상량문(旌閭重修上樑文)이 있다.

 

 

고부이씨 세효려고부이씨 종친회가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 디지털부안문화대전 -

 

 

 

 

고부이씨 세효려.

 

 

 

세효려 현판.

 

 

 

효자별좌이광춘지려(孝子別坐李光春之閭)

 

 

 

효자선공감직장이승간지려(孝子繕工監直長李承幹之閭)

 

 

 

양세정려기(兩世旌閭記)

고부이씨세효정려중수기(古阜李氏世孝旌閭重修記)’

 정려중수상량문(旌閭重修上樑文)’ 같으나

글씨체 읽어 볼 수가 없게 되어있다.

 

 

 

 

 

 

 

 

 

 

 

정려각 바닥이 패어있다.

 

 

 

정려각 돌기둥에 정각 바닥은 통풍이 되게끔 떠있다.

 

 

 

외곽에서 바라본 정려각과 양세정려기.

 

 

 

양세정려기(兩世旌閭記)

 

 

 

양세정려기(兩世旌閭記)

 

 

 

외곽에서 바라본 정려각.

 

 

 

정려각 앞에 자리한 쉼터.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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