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열전 편

머슴의 파자풀이.

백산(栢山) 2025. 6. 24. 05:00

 

머슴의 파자(破字)풀이.
 
 
지금으로부터 3백 90여 년 전.
왜놈들이 자신들의 문명을 발달시킨 왕인(王人)박사의 옛 은혜도 까맣게 잊은 채, 소서행장(小西行長), 가등청정(加藤淸正), 흑전장정(黑田長政) 등의 우두머리와 병졸들을 보내 임진왜란을 일으켜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우리 한민족들을 도탄에 빠뜨려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몇 년간의 피나는 전쟁 끝이라 체면이나 명예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각박한데다 인심마저 흉흉하여 목구멍에 풀칠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백성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굶주리다 못해 칡뿌리나 나무껍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살았다.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인정이 메마를 대로 메말라 마치 10년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논바닥 같이 윤기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때. 전라도에 사는 오천석(吳千石)이란 사람이 한양에 살고 있는 친구 맹사달(孟思達)을 찾아갔다.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 전에도 둘도 없는 친구로서 자신들 입으로도 붕우유신(朋友有信) 관포지교(管鮑之交) 운운하면서 천하에 둘도 없는 친구인 마냥 과시를 하던 사이였다.
 
전라도 친구 오천석은 근근히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였고 한양에 사는 맹사달은 비교적 부유했지만 임진왜란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부모와 형제를 왜란으로 잃은 채 두 내외가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때 같은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을 한 처지라 우정도 우정이었지만 학문도 비슷한 실력이었다. 전라도에서 며칠 동안을 걸어서 한양에 도달하여 맹사달 대문을 두드린 오천석은 지친 몸으로, "여보시오. 여보시오. 아무도 없소?" 하고 대문을 두드리자. 머슴치고는 제법 눈망울이 똑바로 박힌 녀석이 나와 "뉘시오. 이 집 오셨수? 들어오시오." 하여, 머슴의 안내로 친구 맹사달을 만난 오천석은 몇 년간 못 본 친구치고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변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리를 겪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지나쳤다. 한참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흘러간 7,8년 세월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서로의 회포를 나누었다.
 
오천석은 아무리 자신이 품위를 지키는 선비지만 먼 거리를 왔고 아직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데다가 시장기마저 들어 입에서 금방, '어이, 여보게. 나 밥한 술 주겠나.'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양반 체면에 차마 그럴 수가 없어 혼자서만 끙끙 배고픔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부인이 들어와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친구 부인은 뭔가 맹사달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려다 말고 열려다 마는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옛날 같으면 먹기보다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고 애를 쓰던 친구가 전쟁통에 마음이 변했는지 때가 되었는데도 밥 먹자는 말이 없어, 오천석은 할 수 없이 맹사달에게, "지금 몇 시각이나 되었는가?" 고 묻자, "오시(午時:11:00∼13:00시)가 넘어 미시(未時:13:00∼15:00)에 접어든 것 같네." 고 말했다.
 
그리고도 한참 있으려니까. 맹사달 부인이 방으로 들어와 남편인 맹사달에게 파자법으로, "저 서방님 인량복일(人良卜一)이오리까?" 란 이상한 말을 하자 남편인 맹사달이 재빠르게,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 고 응답했다.
 
그때서야 오천석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무슨 뜻인지를 알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면서, "에끼 이 나쁜 사람들! 어디 그럴 수가 있나? 아이고 나 참 이렇게 기가 막힐 일이 있나? 그러니 일소인량(一小人良)이구먼. 에잇, 퉤퉤." 하며, 오천석은 울분을 참지 못해 얼굴이 붉어진 채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마루턱에 앉아 있던 머슴 녀석이 어느 정도 유식했던지, "에이, 기분 나빠. 양반님들의 행동이 그게 뭐여. 어 참말로 정구죽천(丁口竹天)이구먼." 오천석은 머슴 녀석의 문자를 알아듣는 듯, "흥, 너도 제법 풍월을 하는구나." 하며,
 
오천석은 그 길로 맹사달 집을 나와 한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했던 이구수(李九洙)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는 어려운 가세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로 훈훈한 대접을 했다.
 
오천석이 가고 나니 그 집 작은 머슴 하나가 마루턱에 앉아 있다가 문자를 쓴 큰 머슴에게로 다가와, "형님! 형님! 아까 주인양반과 친구, 그리고 형님까지도 무어라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오." 하면서 꼬치꼬치 묻자. 내심 알고 있는 지식을 과시하고자 했던 큰 머슴은 잘 됐다 싶어 파자풀이야 말로 일품이었다.
 
큰 머슴은 작은 머슴에게 부지갱이로 머리통을 몇 번 탕탕 치고서는, "아아, 정신 차려 봐라. 맨 처음 안주인 양반이 인량복일(人良卜一)이라 한 것은 밥상을 올릴까요? 하는 뜻으로 인량(人良)을 다시 써보면 밥식(食)자가 되고 복일은 윗상(上)자로 올린다 또는 드린다는 의미로 쓰이는 데, 여기에서는 올릴 상으로 쓰였던 것이야." 생각보다 이해하기 쉬워서인지 작은 머슴은, "아, 그것 재미있는데 그것 말고 또 있지 않아." 하며 채근을 하자.
 
큰 머슴은 "알아, 임마. 뭐가 그렇게 급해. 바깥양반이 말한 월월산산(月月山山)은 친구가 나가면 밥상을 가져오라는 뜻으로 월월(月月)을 합치면 벗 붕(朋)자가 되고, 산과 산을 합치면 나갈 출자(出字)가 되니까, 결국 친구가 나가면 이란 뜻이 되는 것이야."
 
그러자. 작은 머슴은 자꾸 신기한지, "진짜 그런데. 야아, 글을 배우면 그런 것도 알 수가 있구나. 그럼 친구양반이 화가 잔뜩 나 밖으로 나가면서 뭐라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이야." "응, 그것은 너 같은 놈을 두고 하는 소리야." "예에, 형님! 형님이건 나 같은 놈이건 빨리 풀어보시오." "아, 그러지. 그 양반이 나가면서 일소인량(一小人良)이라 했거든. 그러니까 일소(一小)를 합쳐보면 아니 불자(不字) 되고 인량(人良)은 글자 그대로 어진 사람 또는 착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아니 불(不)자가 붙어 있어 따지고 보면 어질지 못한 사람이란 뜻이야. 알겠냐? 그러니까 너같이 말 안 듣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야."
 
"와아! 형님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주워 들었수. 참 형님도 맨 나중에 뭐라고 했지 않아. 그것도 좀 가르쳐 주슈."
 
작은 머슴의 성화였든, 지식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든 파자풀이를 한 큰 머슴이나 작은 머슴은 한참 흥이 나 있었다.
 
큰 머슴은 제법 논리가 정연하게 글자를 풀이해 준 후 윗저고리 가슴속에서 케케묵은 책 한 권을 꺼내며 혼자서 틈틈이 공부를 하고 있음을 작은 머슴에게 과시했다.
 
한편.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맹사달 집을 나왔던 오천석은 훗날 부자가 되고, 맹사달은 옛날처럼 살림이 기울었다.
 
그러니, 오천석은 복수의 기회가 되기도 했으나, 그런 행위는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맹사달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맹사달은 크게 후회하며 예전의 실책을 오천석에게 깊이 사죄하고 우의(友意)를 더 돈독히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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