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보성. 진원박씨. 죽천 박광전. 화산재(華山齋)

백산(栢山) 2022. 11. 9. 06:00

화산재(華山齋)
 
 
*주소: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303.
 

 
*필자가 화산재를 1차로 다녀간 때는 2015년 11월 22일이었는데, 이번(2022,10,16)에 다시 찾고보니 화산재가 관리 부실로 인하여 보수가 필요하게 보인다.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은 진원박씨 후인으로 보성 조양리 태생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호는 죽천(竹川)이다.
 

 
보성을 빛낸 인물들.
 
백발의 의병장.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
 
"호남은 평소 문헌의 땅으로 불려왔는데,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오직 하서(김인후), 고봉(기대승), 일재(이항), 미암(유희춘), 그리고 나의 스승 죽천(竹川)이 있을 뿐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며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우산 안방준 선생이 박광전의 문집인 《죽천집》에 쓴 글이다. 여기서 그가 스승이라 지칭한 이가 바로 선조 때 대 유학자로서 광해군의 사부를 지낸 죽천 박광전 선생이다.
 
중종 21년(1526) 보성군 조성면 용전리에서 태어난 죽천은 정암 조광조의 절친한 벗인 양응정과 퇴계 이황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했다. 미암 유희춘은 호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인 가운데 한 명인 죽천을 전라도 관찰사로 추천했다.
 
 
 
의로운 백성들이여, 분발하라.
 
죽천의 나이 67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는 이미 관직을 은퇴하고 고향인 보성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국가가 위난에 휩싸이자 뿔뿔이 흩어져 제 살 길을 찾아가는 마당에 야인 신분이었던 죽천은 몸소 700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저서로는 《죽천집》이 있다.
 
 
 
- 웹 사이트 -
 
 

화산재 입문.
 
문은 잠겨있고 보수가 필요할 정도로 쇠락해졌다.
 

헌성비.
 

문강공 죽천 박선생 유적 안내문.
 

화산재.
 
문이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장 밖에서 찰칵했다.
 

화산재 현판.
 
현판 역시 보수가 필요하게 보인다.
 

화산재의 옆 모습.
 

화산재 뒤 사당으로 통하는 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입하기가 불편하여 들어가는 것을 생략했다.
 

관리사였는데 이 건물 역시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 것처럼 보인다.
 

현재 화산재 출입문.
 

화산재 출입문.
 
지난 2015년 11월에 촬영한 것.
 

화산재(華山齋)
 
2015년에 11월에 촬영한 것.
 

죽천 박선생과 배우자 정부인 문씨와 합장 묘소이다.
 
2015년에 11월에 촬영한 것.
 

죽천 박선생 묘소 앞의 문인석과 동자석 등 석물들.
 
2015년에 11월에 촬영한 것.
 
 
 
*다녀온 날: 2022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