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黃洗)장군과 여의(如意)낭자. 가락국 제9대 숙왕(肅王)때 남대정동(南大政洞)에 사는 출정승과 북대사동(北大寺洞:현 대성동)에 사는 황정승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했다. 이후에 황정승은 아들 세(洗)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如意)를 낳게 되자, 출정승은 마음이 변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속였다. 자라면서 여의(如意)는 사내 옷을 입고 서당에 다녔는데,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황세(黃洗)는 개라암(황세바위)에 올라 '오줌 멀리 가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자 여의는 바위 뒤로 돌아가 마침 그곳에 있는 삼대로 오줌을 누어서 낭패를 면하였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여름. 거북내(龜川)에서 미역을 감게되자. 여의는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편지를 물에 거슬러 띄어 보내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고, 출정승도 결국 황세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혼약을 맺어주었다. 얼마 후, 신라군이 침범을 받게된 가야국의 황세는 전장에. 출정하여 큰공을 세우고 개선하게 되었다. 이에 숙왕(肅王)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제수하고, 자신의 외동딸인 유민(流民)공주와 혼례를 시켜 부마로 삼는다. 여의(如意)의 부모는 파혼 당한 여의(如意)낭자에게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권유하지만 낭자는 끝내 부모의 뜻을 거부하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그만 죽고 말았다. 공주와 혼인한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잊지 못하여 마음의 병으로 그 해에 역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매일같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유민공주도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林虎山)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런 이유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 전설과 관련된 곳으로는 여의낭자가 죽어서 혼이 들어갔다고 전해지는 하늘 문이라고 불리는 돌문이 있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약혼한 후 처음으로 놀았다는 평평한 바위인 여의좌(如意座), 그리고, 망견대(望見臺), 여의목(如意木), 황세목(黃洗木), 소변 터 등이 남아 있다. - 고전 중에서 - |
'전설과 설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달래꽃의 전설 (0) | 2016.02.18 |
---|---|
홍수설화(洪水說話) (0) | 2016.01.27 |
동백꽃 전설 (0) | 2015.12.12 |
우렁이 각시 (0) | 2015.11.12 |
호랑이 처녀와 맺은 인연 (0) | 201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