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청 5

전남 나주. 나주임씨. 창계서원(滄溪書院) 창계공 임영(林泳) 사우

창계서원 전경. *주소: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1. 창계서원(滄溪書院)은 호남이 낳은 큰 학자 창계공(滄溪公) 휘(諱) 영(泳)의 사우(祠宇)이다. 나주임씨 20世 창계공 임영(林泳: 1649~1696)은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대사헌 등 청화(淸華)의 관직을 두루 거치기도 하였으나, 보다 학문에 뜻이 깊어 연구와 저술로 일생을 정진, 불후의 대업을 남긴 “일세의 참다운 선비, 백세의 본받을 스승”이었다. 공의 강학(講學)이 주로 이루어졌던 호남에서 공을 흠모하고 모범으로 삼아 떨어진 학(學)을 잇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공의 고토(故土)인 회진에 창계서원이 함평고을에 수산사가 세워졌으며 1770년경 창계서원을 회진에서 신걸산 기슭으로 옮기니 지금의 영성각 터이다. 그 후 혼란(混..

발길을 따라 2024.01.22

전남 곡성. 전남 문화재자료 제120호. 덕산사(德山祠)

덕산사(德山祠) 전남 문화재자료 제120호. (1984년 2월 29일 지정)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음지길 8-3. (지번) 오곡면 덕산리 175-1. 덕산사(德山祠)는 고려 예종 때 원수 윤관(尹瓘: ?∼1111) 장군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66)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윤관은 고려 문신으로 고려와 여진족이 자주 충돌하자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격파하고 9성을 쌓았다. 오연총은 고려의 문신으로 과거에 합격한 후 병부낭중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고려 예종 2년(1107) 원수 윤관과 함께 여진정벌을 나섰고 9城을 쌓았다. 원래 조선 선조 16년(1583)에 함경도 경성(京城)에 지은 이 사당(祠堂)은 1935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문화재 탐방 2022.06.10

전남 곡성. 전남 지방기념물 제56호. 덕양서원(德陽書院)

덕양서원(德陽書院)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56호. (1981.10.20 지정)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51 (덕양서원길 42) 1589년(선조 22)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숭겸(申崇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사우와 위패만 보존되어 오던 중, 1603년에 사우를 중수하고 1665년에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건물을 중수하였다. 그 뒤 1695년(숙종 21) ‘德陽(덕양)’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덕양사(德陽祠) 사우(祠宇), 3칸의 연서재(燕序..

문화재 탐방 2022.06.08

전북 부안. 전북 문화재자료 제93호. 부안향교 대성전.

부안향교 대성전. 扶安鄕校 大成殿.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1984.04.01. 지정) *소재지: 전북 부안읍 향교길 25. 부안향교(扶安鄕校)는 1414년(태종 14)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대성전과 함께 명륜당을 중건하였다. 부안향교는 산의 경사를 따라서 맨 뒤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고, 대성전은 전면에 산의 경사와 나란하게 뒤편에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의 배치를 이루면서 산의 경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하고 있어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와는 조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퇴개방형 건물이다.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어 제향공간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발길을 따라 2021.07.30

전북 남원. 남원향교(南原鄕校) (전북 유형문화재 제8호)

남원향교 홍살문. 남원향교 진강루(振綱樓)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1971.12.02. 지정) ​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길 43 (향교동 512) ​ 남원향교는 조선 전기에 창건된 향교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1971년 12월 2일 지정되었다.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 때 성안 서쪽 골짜기에 처음 세웠다가 얼마 후 요천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요천이 범람할 때마다 학생들이 통학하기 어려워 세종 25년(1443)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한다. 그 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선조 32년(1599)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柳仁沃)이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과 유학자를 모셨으며,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에..

발길을 따라 202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