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나씨 5

전남 영암. 나주나씨. 보본당(報本堂) 나두생(羅斗生) 재실

보본당(報本堂) 저 앞에 보본당 건물이 보이며 좌측 언덕은 나주나씨의 묘역이다. *주소: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금농촌길 103. 보본당(報本堂)은 나주나씨(羅州羅氏) 나두생(羅斗生)의 재실이다. 나두생의 자는 자현(子賢),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나두생은 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나주 반남에서 영암 적진방 나포촌[현, 금농촌]으로 이거하여, 나포정을 짓고 강학 교류에 힘썼다. 뒤에 후손들이 나두생을 기리고자 묘소 곁에 재실 보본당을 지었다. 보본당은 덕진면 소재지에서 서쪽 6㎞ 거리의 덕진면 용산리 3구 금농촌(錦農村)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의 북쪽 언저리에 있다. 인근에 용동제 저수지가 있다. 1938년에 나두생의 묘소 아래에 공을 추모하려는 뜻에서 후손 나도현(羅..

발길을 따라 2024.03.01

전남 나주. 나주나씨. 반계정(潘溪亭) 나덕현(羅德顯) 배향

반계정(潘溪亭)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성내마을에 있는 나주나씨 문중의 정자이다. *주소: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785-1번지. 이 정자는 조선 중기에 정유왜란 피난 때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지낸 은둔소로 사용하였다. 세월이 흘러 퇴락하자 나주나씨 후손들이 1905년 중건하였다. 정자는 단층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재실형(齋室形) 정자로, 내부에 나덕현(羅德顯)의 후손 나공한(羅珙漢), 나도기(羅燾琪) 등 10여 명이 쓴 시(詩)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당시 백양동(白羊洞)에 정착한 입향조 나주나씨(羅州羅氏)의 반계(潘溪) 나덕현(羅德顯: 1565~1625)은 나주에 살다가 처가인 이 마을로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나주나씨는 나주시에서 사마시 합격자..

발길을 따라 2024.02.21

전남 나주. 나주나씨. 나동환 부인, 진주정씨 의열각(義烈閣)

의열각(義烈閣)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나주나씨 나동환의 부인 진주정씨 정려. *본 의열각은 본시 나주시 과원동 121-10번지. 나주목문화관 앞에 자리하고 있던 정각을 나주나씨 금호사 앞으로 이설해 왔다. *주소: 전남 나주시 남내동 4-2번지. 나주나씨 금호회관 옆. 나주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할 당시, 수성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의 공격에 저항했다. 2차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이를 토벌하기 위한 호남초토영(湖南招討營)이 설치되어 강진, 장흥, 영암, 무안까지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당시, 나동환은 동학농민운동 접주로 참여하였다. 그가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아내 진주정씨의 친정인 함평군의 다라실이라는 곳으로 피신했을 때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는..

발길을 따라 2024.02.16

전남 나주. 나주나씨. 금호사(錦湖祠) 나사침(羅士沈) 배향.

나주나씨 금호회관. 나주나씨 종중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금호사 외삼문이 보수공사로 인하여 금호회관을 통하여 금호사에 들어설 수있다. *주소: 전남 나주시 남내동 4-2번지. 금호사(錦湖祠)는 나주나씨의 사당으로, 조선 중기의 효자(孝子) 금호(錦湖) 나사침(羅士沈)과 그의 여섯 아들을 배향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효자(孝子)로, 1544년(중종 39) 정려를 받은 나사침(羅士沈 1525~1596)을 기리기 위하여 1723년(정종 3) 나주읍성 북쪽 대안동(현 나주시 대호동 대안마을)에 건립한 사당이다. 이듬해인 1724년 철폐되었다가 1789년(정조13) 복설을 추진하였는데 '금호사 연혁비'에는 1796년(정조 20) 나사침의 처가(妻家)가 있었던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발길을 따라 2024.02.14

전남 나주. 금성나씨. 경모사(景慕祠)

경모사(景慕祠) 금성나씨 사우 (錦城羅氏 祠宇)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대도대장길 21-5. 금성나씨 가문유래(錦城羅氏 家門由來)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錦城羅氏)는 기원전 759년(주나라 무왕 때)에 광정공(匡正公)이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나라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가 되였다. 금성나씨(錦城羅氏) 대동보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였다. 당(唐) 태종(太宗)때 상서좌북야(尙書左僕射) 나지강공(羅至强公)이 조정의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우리나라(발라형=나주)에 망명한 후 신라국 좌승상 (左丞相)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 十餘代가 대대로 나..

발길을 따라 202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