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방

한양의 풍수 전설

백산(栢山) 2013. 4. 2. 11:26

 

사진 출처 / 김영윤의 여행보따리.

 

 

한양의 풍수 전설.

    

 

1. 한양은 이(李)씨가 주인.

 

풍수승 도선의 [비기(秘記)]에 의한 것과 한양의 지세에 의한 것 2가지가 있다. 前者는 도선의 비기에 <계왕자이 이도어한양(繼王者李 而都於漢陽)>라 하여 고려에서는 오얏나무(李樹)를 심어, 번성하게 하여 벌채함으로써 이것을 염승(厭勝)하려 하였다. 즉, 한양은 이씨의 왕도(王都)로 운명 지워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전설은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이중환의 <팔역지>에 보인다. <잡기>에는 고려의 남경(南京)이란 조(條)에서 <이수(李樹)>를 심고 이성(李姓)을 택하나 윤(尹)씨가 된다. 왕이 한번 돌아보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 이를 진압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팔역지>에는 <고려 중엽 윤관으로 하여금 백악(白岳) 남쪽 땅을 보게 하였고, 이수(李樹)를 심어 번성하게 하더니 이를 베도록 하여 주술[壓勝]을 했다> 라고 언급하여, 양자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결국 왕씨(王氏)가 바뀐다는 이(李)씨에 대한 염승을 행한 것만은 공통된다. 한양이 이씨의 도읍이어야 할 토지라는 것이 고려조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조에서는 널리 선전되고 믿어졌던 것은 확실하다.

 

이씨 한양 천도설은 지세상(地勢上)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의 뒤로 멀리 함경도 안변철령(安邊鐵嶺)의 일맥이 남쪽으로 5~6백 리를 와서 양주(楊州)에 이르고, 간방 북동(艮方北東)에서 비스듬히 들어와 갑자기 일어나 높은 석봉(石峰)으로 도봉(道峰)이 솟아 있고, 여기서 곤방 남서(坤方:南西)를 향해 소단우특기(小斷又特起)한 삼각산 백운대가 있고, 여기서 남하하면 만경대가 있고, 그 한 가지가 좀 더 남쪽으로 뻗쳐 백악(白岳)이 되었다. 이것은 풍수상 목체내룡(木體來龍), 탐랑목성내룡(貪狼木星來龍)이라 한다.

 

<팔역지>에 형가(形家)가 <궁성의 주인은 충천목성(衝天木星)이 된다> 고 말하였다. 충천목성이란 첨두목체산(尖頭木體山), 즉 탐랑목성래용(貪狼木星來龍)으로 목산(木山)이 한양의 주인이 된다는 것으로 목성(木星)이 이 도읍의 주인이라고 해석된다. 즉 목성(木星)의 도읍이라는 것이다.

 

이(李)는 목(木)이다. 이것을 파자(破字)하면 목(木)의 자(子)이다. 하늘에는 목성(木星) 땅에는 이(李), 고로 이씨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도읍을 정한 곳이 한양이라는 것이다. 여러 후보지가 거론되었지만 다른 곳을 제쳐 두고 이곳에 천도하게 된 것은 천인부(天人符)와 어울리는 것이다.

 

 

2. 도성은 강설(降雪)의 천계(天啓)에 의해서 이루어짐.

 

한양의 도성(都城)은 이 태조가 이곳으로 천도하고 나서 공사를 시작해 20만 여명의 일꾼을 사역하여 쌓은 주위 9천9백7십5보(1보는 6척) 그 높이 28척 정도, 궐문루각(闕門樓閣)이 붙은 8개의 문을 가진 웅대한 규모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팔역지>에도 이 전설을 싣고 있다. 궁궐이 완성된 후 성을 쌓고 싶었지만 아직 그 주위에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고 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그렸다.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그 안쪽으로는 쌓여 있지 않았다. 태조는 이것이 필시 천계(天啓)를 내린 것이라 생각하고 선을 따라 성을 쌓았던 것이다.

 

                                          사진 출처 / 김영윤의 여행보따리.

 

 

3. 임진. 병자란은 풍수의 결함 때문.

 

이 도성에 대해서 풍수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한양의 성벽이 강설(降雪)이란 천계(天啓)에서 나왔건 안 나왔건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쌓은 것이지만, 이 산세가 동방(東方)과 남서(南西)가 약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진곤저허(震坤低虛)하고 더욱 담이나 도랑(濠)을 준설하지 않은 까닭에 임진 병자의 두 난을 모두 지킬 능력이 없다> 라고 <팔역지>의 저자는 말한다. 즉, 성벽이 지세상(地勢上) 낮고 허술하다는 것, 도성의 담장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과 도랑을 깊이 파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 병자의 두 난에 대처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풍수적 결함 때문이기도 하다는 전설이다.

 

임진왜란은 제14대왕 선조 25년(1592)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明)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이것을 막고 있는 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한양의 함락은 그 해 4월이었다. 병자호란은 제16대왕 인조 14년(1636) 청의 태종이 조공을 요구한 사절(使節)이 거절당하자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했다.

 

이 때에도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양이 청군에 유린되어 버렸다. 이것은 풍수적으로 말하면 한양의 함락은 성의 담장이나 도랑 때문만이 아니고 도성을 축조할 당초부터 이미, 동쪽과 서남쪽이 침입자에 의해 함락될 운명에 있었던 것이다. 이태조의 축성은 산세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은 4면이 산으로써 에워싸여 있지만, 동쪽과 남서쪽이 공결(空缺)하기 때문에 산세에 따라서 쌓은 성벽도 진방(震方)과 곤방(坤方)이 낮지 않을 수 없다. 풍수에서는 이 낮은 곳을 허(虛)라고 하며, 허(虛)는 외부로부터 침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가장 금하고 있다.

 

그래서 한양은 동방(東方)과 남서(南西)로부터 침입될 운명이었다. 더욱이 진방(震方)은 목(木)의 원(源)이고 이씨(李氏)의 도읍(都邑) 한양이 <양목(兩木), 상쟁(相爭)>의 상극이고, 곤방(坤方)은 토(土)의 원(源)으로 <목극토(木克土)>의 상극(相剋)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씨는 성곽의 풍수적 결함이 없다고 하여도 선천적으로 일본과 중국과는 상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방위를 게을리 하고, 살기가 충만해 있는 진곤양방(震坤兩方)을 허술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진 병자에 쉽게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4. 무학(無學)과 정도전의 좌향론.

 

정도전은 법술에 능통한 학자이다. 한양 천도에 정도전과 무학이 주체가 되었다. 무학은 일찍이 스승 나옹대사를 수행하고 편력하는 길에 우연히 함주(咸州:지금의 함흥)에서 당시 미천한 이성계를 만났다. 마침 이성계는 그의 부 환조(父 桓祖)를 위한 길묘(吉墓)를 구하던 터였다.

 

무학은 이성계의 간청에 의해 매장할 묘지를 정해 주었다. (이것이 지금 함흥에 있는 정릉(定陵)이고, 이 묘 때문에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한다.) 그 후 이성계가 안변(安邊)에서 꿈을 꾸었다. 어떤 노파의 권유에 의해 설봉산(雪峯山) 절에 있는 승려에게 해몽을 청하러 갔다. 그 주지가 바로 무학이었다.

 

그는 이성계에게 반드시 왕이 될 사람이라고 해몽했다. 이성계는 왕위에 즉위하자, 두 번이나 확실히 예견한 무학을 상기하여, 도읍을 무학에게 의뢰하여 정하게 되었다.

 

천도의 땅이 결정되었고 더 나은 궁궐터를 만나 좌향(坐向)을 정할 단계에서 정도전과 무학은 의견의 차이가 생겼다. 정도전은 고금의 학리에 능통한 학자이고, 무학은 신과 같이 적중하는 예언자이어서 모두 신중하게 고려되었을 것이다.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남산과 백악(白岳)을 좌우 용호(龍虎)로 하는 좌향,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정도전은 이에 반하여 고래(古來)로 군주인 자는 모두 남면(南面)하여 정사(政事)를 보았고, 아직 동면(東面)하여 조정에 임한 자를 듣지 못했다고 논하여, 자기의 주장을 고수하여 굽히지 않았다.

 

결국 남면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정해졌다. 무학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200년 후에 내 말이 헛되지 않음을 자각할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신라의 명승 의상대사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서 <도(都)를 택할 자가 승(僧)의 말을 믿고 들으면 국운의 연장을 바랄 수 있으나, 만약 정(鄭)씨가 나와 시비를 품으면 오세(五世)가 되지 못해 찬탈의 화가 생기고 2백년 내외에 탕진될 위험이 있다>라고 하고 있으니, 이 비기(秘記)는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

 

과연 얼마 안 되어 태종의 형제의 싸움이 있고, 세조 반정의 변이 있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출처 / 웹사이트 = <조선의 풍수> 민음사. 1990. 村山智順· 崔吉城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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