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전남 화순. 해망서원(海望書院) 전남 문화재자료 제122호.

백산(栢山) 2017. 6. 26. 09:00

 

 

해망서원(海望書院)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

(1984.02.29)

 

 

전남 화순군 춘양면 섶메길 37-1 (대신리)

 

 

해망서원(海望書院)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1984.02.29)로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정여해를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글을 썼는데 그 중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세조를 중국의 고사를 이용하여 비난한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의 단서가 되었다.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들을 통해 절의를 중요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맥으로 이어졌다.

 

김굉필(1454∼1504)·정여창(1450∼1504)·김일손(1464∼1498)은 정여해와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지만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였다.

 

해망서원(海望書院)은 중종 3년(1508)에 정여해가 스승인 김종직과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 그 후 정여해가 죽자 방치된 것을 지역 유림들이 고종 8년(1871) 정여해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193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고쳐지었다.

 

서원 경내에는 숭의사, 구인당,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다. 숭의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정여해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9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인 구인당은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해망서원(海望書院)은 중종 3년(1508) 돈재 정여해(鄭汝諧)가 그와 스승과 친우관계가 되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하여 참형 당하게 되자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순 해망산록에 해망단을 만들어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그 뒤 정여해가 중종 15년(1520)에 작고하자 황폐되어 오던 것을 고정 8년(1871) 향내 유림들이 그 유풍을 계승하고자 정여해를 합하여 5위를 제향하여 왔으며, 1934년에 그 규모를 현재와 같이 확장하면서 해망서원(海望書院)이라 하였다.

 

정여해는 나주 출생으로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과 수학하여 성종 11년(1480) 진사시에 합격하고 4년 뒤인 성종 15년에는 삭주교수(朔州敎授)에 임용되었으며 성종 18년(1487)에는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향리로 내려와 은거생활을 하다가 중종 25년(1530)에 졸하였다.

 

김종직(1431∼1492년)은 조선초기의 학자로 호는 점필재이며 선산인이다. 세조 5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지내고 무오사화 때 참화를 당했다. 김굉필(1454∼1504년)은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으로 서흥인이다. 김종직 문인으로 행의(行誼)로 추천되어 형조좌랑을 지냈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사사되었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일손(1464∼1498년)의 자는 계운, 호는 탁영이며 김해인이다. 성종 17년(1468) 문과급제, 이조정랑을 지냈고 무오사화 때 피화되었다. 정여창(1450∼1504년)은 자는 백욱, 호는 일두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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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서원 안내문.

 

 

 

해망서원 외삼문.

 

 

 

해망서원.

 

 

 

해망서원과 구인당 편액.

 

 

 

해망서원 묘정비와 중수비.

 

 

 

설락당(說樂堂)

 

 

 

설락당 편액.

 

 

 

이지문(二止門)

 

 

 

숭의사(崇義祠) 사당.

 

 

2017.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