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보성. 영보재(永報齋)

백산(栢山) 2018. 2. 7. 09:00

 

보성. 영보재(永報齋)

 

영보재 역시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아쉽지만 할 수 없이 영보재 뒷편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내부쪽을 향해 몇 장 촬영하고 말았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원동안길 34-8.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안내문.

 

 

송간(宋侃: 1417~1492) 선생의 호는 서재(西齋), 시호는 충강(忠剛),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조선 초기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을 섬겨 관직이 형조참판(刑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및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영보재(永報齋)는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800년(정조 24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1920년과 1979년에 중수하였다. 전체적인 좌향(坐向)은 남향으로 완만한 북고남저(北高南底)의 지형에 정면으로 5칸 측면 1칸을 갖는 장방형(長方形)의 팔작(八作)지붕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다.

 

신도비는 영보재 입구에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조선 말기의 유학자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비문을 짓고, 유학자이면서 의병장으로도 활동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썼으며, 또 하나의 비문은 윤영구가 짓고 김순동이 썼다.

 

선생은 팔도진무사(八道鎭撫使)의 신분으로 1455년(단종원년)에 왕명을 받아 남쪽지방을 순무(巡撫)하고 돌아가려는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곧바로 영월로 달려가 복명하고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여산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의 시해(弑害) 소식을 듣고 계룡산에 들어가니, 때마침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어의(御衣)를 가져와 김시습 등 칠현신(七賢臣)들과 함께 초혼제(招魂祭)를 모신 후 흥양(高興) 마륜촌(馬輪村) 요이곡(要而谷)에 은거(隱居)하여, 3년 복상을 치르고 야간에는 후학들을 돌보고 산등(山嶝)에 서산정(西山亭)을 세워 조석으로 북향배곡(北向拜哭)하며 구주(舊主)를 사모하며 숨어 지냈다.

 

 

- 웹사이트 -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안내비문.

문화재 자료 제280호(2016.3.24)

 

 

영보재 입구 일각문.

 

 

영보재 입구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생각 끝에 영보재 뒷편의 언덕으로 올라가서 영보재를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뒷편 언덕에서 바라본 영보재.

 

 

종 기념비석들.

 

 

영보재각.

 

 

 

 

2017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