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함평. 월악정사(月岳精舍)

백산(栢山) 2019. 3. 20. 09:00

 

함평. 월악정사(月岳精舍) 전경.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592-1(월삼길 165)


 

월악정사는 월악리를 가로 지르는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일반 가정집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대문이 잠겨있어 황당했는데 대문 옆에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월악정사 옆의 건물은 관리사인듯 하나  인기척은 없었다. 

다만, 월악정사 앞 마당에 자리한 몽양재 정선생 행적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월악정사 외문.

 

 

월야면 월악리  연당(蓮塘)마을, 낮은 구릉성 산지가 뻗어 있을 뿐 대체로 5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구릉지와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어 시야가 좋아 편안하게 만들게 하는 자연마을이다. 마을입구 언저리에 위치한 또 다른 정자 함평 월악정사(月山精舍)를 만난다.

 

이 마을은 오목한 소쿠리형이며 마을 앞에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서 연꽃이 피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해서 연꽃 연(蓮)자와 못 당(塘)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연당(蓮塘, 1789년)이라 했던 것으로 보아 정 일대에 연방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없다.

 

이 마을 첫 입향조는 진주정씨 정태일(鄭泰一)로 1500년대 중순경에 입촌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후손인 몽양재(蒙養齋) 정태환(鄭泰桓 1865~1938)의 휴식소로 사용한 월악정사(月岳精舍)가 마을 입구 좌측편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정재각의 10곳 중 8곳은 일제강점기 때 신축. 중보수했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건립연대는 정사현판을  현판 글씨를 예조·이조판서 석방(石邨)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쓰인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기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의 인생말년에 수헌(睡軒)이라는 호를 썼다. 

 

또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의 후손이요, 순국지사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의 아들 후암(後菴) 송증헌(宋曾憲, 1878∼1947)이  월악정사기(月岳精舍記)를 남겼다.

 

정면 4칸에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우측에 몽양재의 유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정태환(鄭泰桓, 1865~1938)은 자 용구(用九), 호 몽양(蒙養),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아버지 한원(漢源)과, 어머니 죽산안씨(竹山安氏) 수봉(秀鳳)의 딸 사이에서, 1865년(고종 2)에 함평군 월야(月也, 함평군 월야면 월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족숙(族叔)인 미재공(薇齋公)과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과 족조(族祖)인 미재 정재필(薇齋 鄭在弼)에게 배웠으며, 일암(一菴) 이규철(李圭哲, 1854~1925),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 외당(畏堂) 고한주(高漢柱, 1871~1959), 육봉(六峯) 이종택(李鍾宅, 1865~1942)과 족형(族兄)인 정필상(鄭弼相)과 정병휴(鄭炳休) 등과 도의로 종유했다.

 

그는 임란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를 저술하였던 정호인(鄭好仁)의 후손으로 평소에 검약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았다.

 

만년에는 월악산 아래에 몽양재(蒙養齋)와 정자를 축성하고 동지들과 자질들을 모아 몽양재학규(蒙養齋學規)를 만들어 강서논문(講書論文)하였으며, 한가할 때에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등 명리에 초탈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처사적 삶으로 생활하였다.

 

 

- 참조: 南道 정자기행 -

 

 

월악정사.

 

잠겨있는 대문 옆으로 월악정사의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월악정사 옆으로는 관리사인듯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월악정사.

 

 

월악정사 현판.

 

현판은 예조·병조판서를 지낸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53 철종 4~1939)의 필체이다.

 

 

몽양재 정선생 행적비.

 

 

 

201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