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

전북 김제. 망해사 낙서전(樂西殿) 전북 문화재자료 제128호.

백산(栢山) 2023. 1. 18. 05:00

망해사(望海寺)


2020 한국관광공사
비대면 관광지 100선 선정되었다.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 (심포10길 94)


망해사는 754년(경덕왕 13) 통장법사(通藏法師)가 창건한 후 성쇠를 거듭하다가 1609년(광해군 1)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였다.

1933년부터 다시 본전을 개수하였고, 1977년에는 보광명전(普光明殿)· 칠성각(七星閣)· 낙서전을 복원· 중수하였다.

1984년에는 보광명전과 칠성각을 헐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1989년 종각을 새로 지었다.

망해사 이정표와 애국지사 곽경열 선생 추모비 이정표가 함께 붙어있다.

망해사로 향하는 길목.

망해사 안내판이 길손을 반긴다.

안내판 바로 옆에 부도탑이 있다.

잠시 후 망해사 도량에 들어섰다.

도량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목이 되어있다.

범종각과 5층석탑.

청조헌(聽潮軒)

서해바다의 조수가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가 아닐까? 사료된다.

망해사라는 현판은 붙어 있으나 수도하는 당우이다.

망해사 현판.

극락전.

낙서전.

망해사 낙서전 안내문.


망해사 낙서전
望海寺 樂西殿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1986년 9월 8일. 지정)



망해사 낙서전은 1589년(선조 22) 진묵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1977년 복원·중수하였고, 1986년에는 해체·복원하였다.

망해사 낙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에 팔작지붕으로 지은 ‘ㄱ’자형 목조 기와집이다. 평면은 중앙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과 대청·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1단의 화강암 기단 위에 방형의 가공된 주초와 덤벙주초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상부에서 도리·보와 결구하고 있다.

도리는 굴도리이며 공포는 익공(翼工) 양식이다. 지붕은 5량 집으로 꺾인 팔작지붕 양식이다. 편액에 ‘낙서전(樂西殿)’이라 써있고, 4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망해사 낙서전은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소유 및 관리는 망해사에서 하고 있다. 건물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

망해사의 팽나무.

낙서전 앞에 두 그루의 팽나무.

망해사의 팽나무 안내문.

수도간.

삼성각.

5층석탑과 느티나무.

망해사 도량에서 바라보는 새만금 방조제.

망해사 도량에서 바라보는 새만금 방조제.



*아래는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입니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

본 추모비는 망해사 입구 주차장 부근에 세워져 있다.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

전라북도 김제 출신 독립운동가 곽경렬 선생(1901∼1968)은 1915年 항일비밀결사인 광복단에 입단하여 한훈· 류장렬 등과 함께 박곡· 벌교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의 일본 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6年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1918年 친일파 이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습니다.

1920年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年 군자금모금활동 사실이 탐지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6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곽경렬 선생은 한인 반역자를 수시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처단하는 행형부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계속 한훈을 따라 日本 앞잡이들을 숙청하기에 전력을 다 하였는데 멀리 금강산으로 들어가 김동평과 윤답중 등 부일분자들을 사살하였습니다. 그 후 몸을 피하여 일시 만주로 망명을 하였던 것인데 그 때 권총 1정을 휴대한 채 향리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1919年 03月 민족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일시 거사를 중지하고 있다가 동년 12月 11日 전북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 김영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으로 당시 화폐 27원을 받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4年 체포당하여 2년 여의 모진 고문 끝에 1926年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29年 04月 01日 전주 감옥에서 출옥한 후로는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29세의 나이에 반병신이 되어 재향 영농에 치중하다 김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1968年 06月 향년 6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에서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국가보훈처 -

현충시설 지정서.

관리번호: 51-1-49.
애국지사 남촌 곽경열 선생 추모비.

2009년 9월 22일.
국가보훈처장.




*다녀온 날: 2023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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