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방

조선 황실의 호칭.

백산(栢山) 2024. 9. 24. 05:00

 

 

조선 황실의 호칭.

 

1. .

생전에는 임금님 전하로 불린다.

 

조선시대의 왕은 사후에 자신이 살았던 일생을 평가받는다. 시호(諡號)와 묘호(廟號)가 그것이다.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다. 묘호는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정하며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하는 등의 칭호가 廟號.

 

廟號의 뒤에는 조()와 종()이 붙는데, 보통 는 공()이 탁월한 에게 붙이고, 이에 비해 덕()이 출중한 에게는 종()을 붙인다.

 

따라서 창업군주에 버금가는 중흥군주에게 이 붙는다. 대체로 나라를 세웠거나 변란에서 백성을 구한 굵직한 업적이 있는 이나 피바람을 일으킨 들이 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 그에 해당한다.

 

앞선 治積을 이어 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文物을 융성하게 한 은 대개 종()자로 부른다.

창업(創業), 수성(守成)이라 하면 외우기 쉬울 것 같다.

禮記()이 있는 가 되고, ()이 있는 이 된다는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27 가운데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7명만 자를 썼다.

죽어서 으로 대접받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모두 을 쓴다.

 

太祖는 나라를 처음 세웠기 때문에 가 붙었다.

나머지 祖字 王은 큰 국난을 극복했거나(선조, 인조), 반정을 통해 에 오른 경우(세조)이다.

영조, 정조, 순조는 숨지고 바로 을 썼지만 후에 자로 바뀌었다.

조선 後期로 갈수록 을 나누는 기준이 불투명해졌다.

은 원래 격에서 차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이런 이름 바꾸기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史學者 신명호씨에 따르면 를 붙일지, 을 붙일지는 後世의 평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이미 정한 廟號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예컨대 宣祖의 경우 처음의 廟號는 선종이었다고 한다. 보다는 이 앞선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주장하여 이를 宣祖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커다란 공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 중종의 경우는 연산군을 몰아낸 큰공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인종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臣僚들의 반대로 그냥 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폐위된 왕에게는 군()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왕으로서 조선시대 유교적 질서에서 크게 벗어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군주에게 붙여졌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이들은 왕의 자격을 박탈당한 군주이기에 종묘상의 廟號도 없다.

 

살았을 때와 다르게 왕들에게 이런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 사당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기 위해서이다. 이런 이름을 묘호(廟號)라고 부른다.

 

으로 죽은 왕을 부르는 것은 삼국시대에 신라 무열왕이 사용했고, 고려는 태조 왕건 이후 죽 사용하다가 나라의 간섭으로 쓰지 못했다. 조선에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름법을 사용했다

 

 

2. 왕비.

역시 생전에 마마, 전하로 불리운다.

 

고려에서는 왕의 적처(嫡妻)를 왕후라 하고, 그 후궁은 부인(夫人)이라 하여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호칭을 하였으며, 후궁인 부인들에게는 내명부(內命婦) 벼슬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의 명칭과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이 명칭은 정종(靖宗) 이후 궁주(宮主) ·원주(院主) 또는 옹주(翁主) 등 개칭이 빈번하였다.

 

그는 건국과정에 호족(豪族) ·공신(功臣) ·귀화귀족(歸化貴族)들을 회유하기 위한 혼인정책으로 제1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부르고 부인이라 칭한 후궁만 20명이 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제후국(諸侯國)의 예()를 뚜렷이 하여, 왕의 적처는 후()라 하지 않고, 격하하여 비()라 하고, 후궁들에게는 내명부의 벼슬을 주어 숙원(淑媛:4) ·소원(昭媛:4) ·숙용(淑容:3) ·소용(昭容:3) ·숙의(淑儀:2) ·소의(昭儀:2) ·귀인(貴人:1)의 순으로 올리고, 후궁의 으뜸은 빈(:1)이라 하였다.

 

에는 처음부터 왕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왕비나 세자빈과 같이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간택하여 들어오는 경우와, 궁녀로 들어왔다가 왕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고 궁녀에서 소용 ·숙의 등을 거쳐 빈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다.

 

경종(景宗)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 등 선원보(璿源譜)에 올라 있는 역대 빈들은 거의 후자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후궁은 규정으로만 하여도 숙원에서 빈까지 8명에 이르나,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영조와 같이 치적(治績)이 뚜렷하다고 후대에 인정받은 왕들은 후궁의 수가 많아, 이들에게는 자녀를 낳은 후궁이 9명이었고, 자녀를 낳지 않아 선원보에 오르지 않은 여인까지 합하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897(광무 1)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황제국으로 격상하면서 귀비 ·귀빈 ·귀인 등 중국과 같은 호칭으로 올랐고, 이를 아울러 3부인(夫人)이라 하였다.

 

 

3. 부원군.

조선시대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 또는 정1품 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

 

받는 사람의 본관(本貫)인 지명(地名)을 앞에 붙였으며, 같은 호칭이 여럿 생길 때에는 연고(緣故) 있는 지명 또는 다른 함자를 넣어 불렀다.

 

일반적으로 딸이 궁중에 들어와 정실 왕후가 되면, 왕비의 부친은 자동적으로 부원군이 되었다. 초기에는 국구가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기 이후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많은 폐단을 낳았다

 

 

4. 대원군.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던 말.

 

보통 대원군이라고 하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지칭하는데, 조선의 대원군제도는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철종의 아버지 전계(全溪)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定遠)대원군 등이 있다.

 

 

5. 대군.

임금의 적자 가운데 적장자(嫡長子)는 대체로 왕세자(王世子)가 되었으며, 그 밖의 아들들은 모두 대군이 되었다.

 

종친부에 속하였으나 관품(官品)을 가지지 않았으며, 벼슬을 했을 때에는 영종정경(領宗正卿)이라 하였다. 대군은 원칙적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경우와 같은 예외도 있었다.

 

 

6. 부원대군(府院大君).

고려 초기에 사용하다가, 현종 때는 사용하지 않고, 충렬왕 이후 다시 사용하였다.

 

조선 왕조가 창건된 뒤 얼마동안 고려 충렬왕 이후의 법제를 그대로 사용, () 고려 종실(宗室)에 있던 제공(提控)을 부원대군이라 하여 대접하였다. 얼마 뒤 대군으로 대치, 종래의 호칭은 폐지되었다.

 

 

7. .

고려 ·조선 초기에 친왕자에게 준 작호(爵號).

 

고려 초기에 사용하다가, 현종 때는 사용하지 않고, 충렬왕 이후 다시 사용하였다.

조선 왕조가 창건된 뒤 얼마동안 고려 충렬왕 이후의 법제를 그대로 사용, () 고려 종실(宗室)에 있던 제공(提控)을 부원대군이라 하여 대접하였다. 얼마 뒤 대군으로 대치, 종래의 호칭은 폐지되었다.

 

 

8. 종친.

국왕의 부계친척.

 

조선시대는 임금의 적자(嫡子) 자손은 4대손(四代孫)까지, 서자(庶子)의 자손은 3代孫까지를 종친으로 대우하여 군()으로 봉하였다.

 

종친에는 정원(定員)이 없으며, 양민(良民) 출신의 첩()에서 난 종친은 다른 종친보다 그 품계를 1등 낮추고, 천민(賤民) 출신의 첩 소생은 한 등을 더 낮추었으며, 또한 승습직(承襲職)은 그 에 있던 부친이 사망한 뒤라야 임명하였으며, 종친의 한계가 지나면 일반 문무관 자손들의 예에 따라 임용하였다.

 

 

9. 공주.

왕의 정실왕비가 낳은 딸에 대한 칭호.

 

이 명칭은 중국의 진(()나라 때 황제가 딸의 혼인을 삼공(三公:大司馬·大司公·大司徒)에게 맡겨 주관하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주위의 군주를 회유하기 위하여 외민족(外民族)에게 출가시킨 제실(帝室)이나 왕족의 부녀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고 하였는데, 고려시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에게 출가해 온 원()나라의 공주가 그 예이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고대에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과의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樂浪公主), 고구려 평원왕의 딸로서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평강공주(平岡公主)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는 공주에게 정1품 품계를 주었으며, 조선 전기의 경국대전에서는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측실이 낳은 딸을 옹주(翁主)라 하여 구별하는 한편, 공주는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外命婦)의 최상위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공주의 남편은 중국과 같이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하고, 공주의 부마에게는 처음에 종1품의 위()를 주었다가 정1품의 위로 올려 주었으며, 옹주의 부마에게는 처음에 종2, 다음에 정2품으로 올리는 등 역시 구별하였다.

 

 

10. 옹주.

고려 ·조선시대 국왕의 첩 또는 국왕의 서녀(庶女) 등에게 준 작호(爵號).

 

고려 초기에는 내 ·외명부에 일정한 제도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현종 때 국왕의 첩에게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의 호()를 주었고, 정종(靖宗) 때에는 이들을 원주(院主) ·원비(院妃)와 궁주(宮主)라 하던 것을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개칭, 1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 뒤 옹주라는 칭호가 남용되어 논란이 있자 1391(공양왕 3)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후궁(後宮) 소생의 딸에게 주던 작호이다. 공주(公主)와 함께 품계(品階)를 초월한 무계(無階), 외명부의 가장 윗자리이다.

옹주에게 장가 든 자는 처음에는 종2품의 위()로 봉()하였다가 나중에는 정2품으로 올려주었다. 또한 옹주의 처소를 옹주방이라 하였다.

 

 

11. 궁주.

귀비(貴妃) ·숙비(淑妃) ·현비(賢妃) 등 여러 비 아래의 작호이다.

 

성종 때 생겨나 26대 충선왕(忠宣王) 때 옹주(翁主)로 바뀌었다

 

 

12. 부부인.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의 하나로 왕비의 어머니나 대군(大君)의 처에게 내린 칭호. 1품에 해당된다.

 

외명부란 종친(宗親)의 여자 및 문무관(文武官)의 아내로서 남편의 직품(職品)에 따라 봉작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공주(公主:임금의 嫡女) ·옹주(翁主:임금의 庶女) ·부부인 ·봉보부인(奉保夫人:1) ·군주(郡主:왕세자의 嫡女 2) ·군부인(郡夫人:1) 등이 있으며 2품 이상인 사람은 모두 읍호(邑號)를 사용하였다.

 

 

13. 군부인.

조선시대 정·1품의 종친(宗親) 아내에게 내려준 작호.

 

당나라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와 처를 칭하였던 데서 비롯되며, 세종 때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하여 군부인 앞에 읍호(邑號)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성종 때에는 군의 처에게만 주도록 제정되었다. 군부인은 왕의 며느리로서 본인이 영예를 누릴 뿐만 아니라, 족친에게도 물심양면의 혜택을 주었다.

 

 

14. 궁녀.

궁중에서 대전(大殿) ·내전(內殿)을 모시던 모든 여인들, 즉 내명부(內命婦)의 총칭.

 

일반적으로는 상궁과 나인만을 의미하지만, 나인들과 그 아래 하역을 맡은 무수리·각심이·방자(房子의녀(醫女손님 등이 모두 포함된다.

 

한국 궁녀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비롯되었다. 넓은 의미의 궁녀에 포함되는 무수리는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들이다.

 

또 각심이는 상궁이 비번 날 살게 되는 개인의 처소에서 부리던 가정부·식모·찬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은 국가에서 지불하였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이 외에 손님은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가 바쳐지고 독립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다른 궁중의 시녀들, 곧 무수리나 각심이 등과는 다르게 예의를 갖추어 주는 말로 보인다.

 

다음으로 의녀란 궁중의 내의원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좁은 의미의 궁녀라고 일컫는 나인과 상궁도 구분이 명백하였다.

 

보통 궁녀에는 3가지 등급이 있었는데, 상궁·나인·애기나인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이들도 입궁시기와 소속부서에 따라서 격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고, 그들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상궁이었다. 상궁 밑으로는 나인이 있었으며, 이들의 역할은 상궁과 거의 같았으나, 주로 상궁의 보조역할을 하였다. 나인 아래에는 애기나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라고도 하였다.

 

궁녀의 출신계급은 지밀(至蜜)과 침방(針房수방(繡房)은 중인계급, 기타는 상인계급이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린 48, 침방과 수방은 613, 그 외에는 1213세가 일반적이었다.

 

궁녀는 20세 전후에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나인이 된 후에는 15년이 경과되어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 상궁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손을 낳기 전에는 상궁으로 머물게 되지만, 대신 궁녀의 기본적 임무는 주어지지 않고 왕의 시중만 전담하게 되었다. 이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일컫는데,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6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지고 독립세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궁녀는 실제로 왕족들이 자신들의 생활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존재였다. 궁궐 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러나 중병 또는 가뭄으로 궁녀방출이 이루어지거나 모시고 있던 상전이 죽는 경우에는 중도에서 궁궐을 나갈 수 있었다.

 

영조, 정조, 순조, 익조는 원래 영종, 정종, 순종, 익종이었으나 高宗 때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國號를 바꾸면서 이 황제로 격상되었으므로 5代祖까지 황제로 추존하고 명칭도 로 추존한 것임.

 

그에 따라 영종은 영조로, 사도세자가 장조, 정종은 정조, 순종은 순조, 익종은 문조 익황제(왕이 되기 전에 사망)로 바뀌었음.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이지만 익황제의 양자가 되었음. 그리고 헌종과 철종은 항렬상 고종의 형제 벌이므로 추존되지 않았음

 

* ()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 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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