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5

전북 정읍. 전봉준 유적(全琫準 遺跡)

전봉준 선생 고택 전경. 사적 제293호 (1981.11.28 지정)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조소1길 20) *과거에는 전봉준 선생 고택으로 불렸으나 2011.07.28 이후부터는 정읍 전봉준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정읍 전봉준 유적 안내문.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에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

동학 유적지 2020.03.23

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蹟地)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蹟地) 사적 제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3 (하학리 산 3-5) 황토현 전적지(黃土峴 戰蹟地) 황토현 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로서 1894년(갑오년) 동학혁명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싸움터이다. 조선 고종 31년 정월(양 2. 17)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학정을 일삼던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해 백산에서 다시 봉기한 농민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 황토현에 진을 치고 있던 전라감영의 관군을 4월 7일(양 5.11) 새벽, 기습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의 사기를 크게 높여주었고 당시 농민들이 외쳤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

동학 유적지 2020.03.14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다녀온 날: 2019년 11월 10일.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하학리 11-1)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동학농민군의 최초 전승지인 황토현전적지(사적 295호)내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에서 2004년 5월 11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전라북도청에서 관리사업소를 두고 관리·운영해 오다, 2011년 1월부터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관리·운영하고 있다. 1894년 반부패·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수만의 無名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에서 파견한 관군을 크게 이긴 최초의 전승지로, 향후 고부민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지로 이를 추모 및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농민..

동학 유적지 2020.03.13

전북 정읍. 전봉준 유적(全琫準 遺蹟)

전봉준 선생 고가 전경. 사적 제293호 (1981.11.28 지정) *주소: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조소1길 20) *과거에는 전봉준선생 고택으로 불렸으나 2011.07.28 이후부터는 정읍 전봉준 유적으로 개칭되어 오고 있다. 정읍 전봉준 유적 안내문.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에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

동학 유적지 2019.05.13

전북 고창. 전봉준 장군 생가터

전봉준 장군 생가터 전경.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당촌길 41-8)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 안내판. - 전봉준(全琫準): 1855(철종 6)∼1895(고종 32).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 전봉준 장군의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전봉준 장군은 반외세를 외치며 거병(擧兵)했으나 밀고를 당해 1895년 4월 41세에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

동학 유적지 201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