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방

바둑 즐기다 망한 선비들

백산(栢山) 2011. 6. 10. 15:43

 

 

 

바둑 즐기다 망한 선비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즐겼지만 특히

조선시대에는 바둑에 대한 선비들의 인식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태종 13년(1413) 6월 7일 내시 송지도와 약방의원 이헌이 창덕궁에서 바둑을 두다

적발되어 옥에 갇혔다가 사흘만에 풀려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태종 16년(1416) 9월 19일에 들어가보니 바둑 때문에 세자(양녕대군)와 동생 충녕대군

(후에 세종)이 말다툼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세자(양녕대군)가 홍덕사에 가서 신의왕후

(태조 이성계의 부인 한씨) 제상에 향을 올린 후 바둑을 두었다.

 

충녕대군이 "세자의 지존으로서 간사한 소인배와 놀음놀이를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더구나 할머니 제삿날인데..." 그러자, 세자가 "너는 관음전에 가서 잠이나 자라." 했다.

충녕대군은 "어찌 미세한 사람과 오락을 즐길 수 있습니까." 했다.

 

충녕대군이 항상 세자가 근신하지 못하는 행동에 대해 "조물주가 이빨을 주고 뿔을 없애고

날개를 붙이고 두 발을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인군자와 야인의 분수를 밝혔으니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어 어지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미세한 사람과 더불어 오락을

즐길 수 있습니까." 했다.

 

왕들 중에서는 세조가 바둑을 즐긴 임금이었다. 세조 11년(1465) 6월 5일 영의정 신숙주,

한명회, 좌의정 구치관, 우의정 황수신, 좌참찬 최항과 승지 등을 불러 말 세 필을 걸고

바둑을 두었는데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이 노름을 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 13년(1467) 2월 11일엔 바둑을 즐겼던 물거윤 이철의 졸기가 실려있다.

물거윤 이철이 졸했다. 이철은 보성군 이합의 아들이다. 처음에 은산령에 제수 했다가

거제정으로 고쳤고, 다시 물거윤으로 고쳤다. 이철은 술에 취하면 눈동자가 맑지 않았는데,

방언에 눈이 맑지 않은 것을 '물거'라 하기 때문에 임금이 희롱하여 이것으로 이름을 붙여서

물거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철은 전법에 밝고 장기와 바둑을 잘 두었으며, 젊어서 기병과 정병에 능해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됐다. 그가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고 즉시 염빈을 하지 말게 했으니

이는 대개 소생하기를 바래서였다.

 

명종 21년(1566) 3월 12일에도 바둑을 잘 두는 선비들의 이야기가 발견됐다.

유강을 한성부판윤에, 남궁침을 한성부좌윤에, 민기문을 성균관사예에 임명했다.

민기문은 천성이 단아한 인물이었는데, 을사사화 때 대간으로 밀지에 대해 참론하는

바람에 20년 간 놀다가 비로소 벼슬에 임명됐다.

이양이 그의 바둑솜씨가 높다는 말을 듣고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황삼성을 보내 강요까지 했으나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인조 2년(1624) 11월 21일에는 일본에서 바둑판을 보내왔는데 신하들이 '바둑은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사대부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물건인데 구중궁궐에 둘 수는 없는 일'

이라며 되돌려 줄 것을 간청하는 기록도 보인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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