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사랑방

민속 신앙

백산(栢山) 2012. 7. 5. 11:00

 

 

 

민속 신앙

 

1. 객귀(客鬼)풀이

 

객귀란 글자 그대로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말하는 것인데, 외출하였다가 돌아와서 갑자기 병에 걸렸다던가 또는 다른 집에서 들어온 음식물을 먹고 갑자기 병(病)이 났을 때에 농촌에서는 흔히 객귀 들렸다 하여 이를 쫓아내는 것이다.

 

객귀 쫓아내는 것을 객귀(客鬼)를 물린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다년간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판수가 주로 실시한다.

 

병자(病者) 측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판수는 병자의 상태를 살펴본 다음, 객귀를 쫓아내기 위해 즉시 된장국(토장국)을 끓이게 하여 이를 바가지에 담아 가지고 병자의 입 앞에 갔다 대며 침을 3번 뱉게 한다.

 

이때 판수는 병자의 머리카락을 부엌칼로 3번 조금씩 잘라 바가지에 넣어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재빨리 방문을 닫고 칼로 문살을 득득 엑스(X)자 형으로 긁은 다음, 방문에 소금을 뿌리고 마당에 나와 된장국을 버리는데, 이때 주문(呪文)을 외고 바가지는 자기 발 앞에 엎어놓으며 칼끝으로 땅바닥을 약 1m가량 가로로 긋고서 10여보 앞으로 칼을 던지어 땅바닥에 꽂히게 한다.

 

이때 꽂힌 칼날이 집 안쪽으로 향해 있으면 칼을 빼내어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왜냐하면 칼날이 집안으로 향해 있으면 아직 病者에 붙어있는 귀신(客鬼)이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미신적인 행위인 것이지만 이같이 客鬼풀이를 하면 病者가 낫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요즘은 이 같은 습속도 없어졌지만, 病이 나면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주문(呪文)

 

각항저방심미기  규루위묘필자삼  정귀욱성장익진  두우여허위실벽

(角亢底房心尾箕 奎婁胃昴畢紫參  井鬼柳星張翼軫  斗牛女虛危室壁)

 

이 주문을 큰 소리로 외는데, 처음은 바로 하고 다음은 거꾸로 외어야 한다.

귀신이 나갈 때까지 되풀이해야 한다.

 

 

2. 굿.

 

굿이란 무당이 노래와 춤을 추며 신에게 치성 드리는 의식의 하나이다.

즉, 초복(招福)  제액(除厄)  안택(安宅)  요병(療病)  진령(鎭靈)  초혼(招魂)  기우(祈雨)  축귀(逐鬼) 등을 목적으로 무당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는 노래  춤  의식  일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굿은 시종 노래와 춤을 위주로 진행되는데, 이때의 춤은 도무(跳舞)이며 노래는 신가(神歌)를 부르는데, 처음은 두 박자인 덩덩으로부터 시작하여 덩덕궁의 세 박자 음률로 연속되다가, 절정에 이르면 다시 다섯 박자인 덩덩 덩덕궁의 음률로 반복되면서 굿은 계속 된다. 그런데 굿은 대략 4단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제1단계를 무격(巫覡)이 신령을 초청하는 것이다.

 

초청한 신령이 강림(降臨)하면, 무격은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의 이야기는 신령들에게 제주(祭主)의 청(請)을 알리는 일종의 대담이 되는 것이다. 이 대담에 이어 제2단계로 들어가는데, 이때는 도무(跳舞)와 함께 지나칠 정도의 행동과 소리를 크게 외치면서 진행되는데, 굿의 목적이 병자를 치유하는데 있다면, 신령에게 병의 근원을 물어 이 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령에게 치유를 부탁하며 제3단계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무격들이 장구를 치고 방울을 흔들며 또한 무악으로 환자에게 주술적인 행동을 하면서, 병귀(病鬼)에게 음식물을 주어 이를 먹고 나가라는 것이다. 즉 축귀(逐鬼)하는 시늉을 한다. 이것으로 병자의 치유가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4단계에 들어가는데, 여기서는 병자 치유의 목적으로 초청했던 신령들을 다시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마무리의 절차로써 굿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굿은 이 4단계의 각 과정에서 거리의 행사가 있게 되는데, 대략 12내지 14거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도 역시 무격과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참고로 12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청  가망청배  젠적  불사  조상  상산  별상  대감  제석  오귀  군웅  창부 등이다. 그리고, 굿은 대개 씨끔굿(일명 오구굿), 안택굿, 별신굿 등이 있다.

 

요즘도 굿이 간간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원형과는 거리가 먼 매우 변형되고 또한 간소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대적인 감각에서 이 굿을 본다면 다분히 원시적이요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런 논리적인 거론 이전에 굿은 우리 민족의 토속종교의 하나로 그 토대를 굳혀 오면서 민족의 생활을 지배하여 온 정신적인 힘의 근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3. 산신제(山神祭)

 

집터를 지키는 터주신(地神)이 있고, 집을 지키는 성주가 있는가 하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있듯이, 산에는 역시 산을 지키는 산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산신의 모습은 흔히 신선이나 호랑이 상으로 나타냈는데, 산소를 쓰거나 산소에 제사를 지내거나 혹은 산을 다룰 때는 반드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으니 이를 산신제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산신제의 내력을 살펴보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즉 신라는 이미 3산5악에, 그리고 고려는 송악산과 남산 등에 춘추로 산신제를 지냈는데, 이 유 풍은 다음의 조선조로 이어져 내려와 국가의 태평을 비는 산신제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습속이 남아 있어 산을 다룰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것 같다.

 

 

4. 삼신제(三神祭)

 

삼신이란 아기의 점지와 산모. 그리고 생아를 맡아보며 수호한다는 3신령을 말하는 것인데, 아기를 낳으면 3일이 되는 날에 방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 밥 세 그릇과, 미역국 세 그릇을 차려놓고 삼신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신제를 지내는 것은 어린 아기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렸을 때나 산모가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삼신할머니에게 밥을 해 놓고, 빨리 병이 낫고 젖이 잘 나오도록 하여 달라고 삼신제를 지냈는데, 요즘은 이 같은 습속이 거의 사라진 것 같다.

 

  

5. 서낭제(城隍祭)

 

서낭제란 서낭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함인데, 이 서낭신은 한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드는 신이다. 서낭은 대개 마을의 입구 산마루에 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서낭제를 지내는가 하면 또는 개인의 구복(求福)을 위해 지내기도 하였다. 서낭제 때는 떡시루를 비롯하여, 포(脯), 채 등을 갖추어 놓고, 또한 색깔의 헝겊을 오려서 울긋불긋하게 나무 가지에 묶어 놓는다.

 

새벽 일찍 나들이를 떠나다 서낭제 떡을 발견하면 먹는 수도 있으나, 이땐 다 먹는 것이 아니고 일부만 먹는데, 이 떡은 집에 가지고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지 않고 그래도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낭당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돌을 3개 주어서 서낭에 던지고 침을 3번 뱉어야 한다는 풍속이 극히 최근에까지 내려왔으나,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낭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놓았기 때문에 마치 무덤같이 되었는가 하면 나무가 우거지고 또한 나무 가지에는 5색의 헝겊이 매달려 있어 우중충하게 보이므로 밤엔 이곳을 지나기를 뭇 사람들이 매우 꺼려하고 있다.

 

지금은 사회적인 발전과 도로확장 등으로 인하여 이 같은 서낭당이 대부분 없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또한 이런 사실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6. 안택(安宅)

 

안택이란 글자 그대로 집안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일종의 제의(祭儀)형식인 것이다. 즉 안택은 주로 판수나 무당이 안택경(安宅經)을 외며 집안에 탈이 없도록 터주 신을 비롯하여 성주신 조왕신 등을 위로 제사하는 것이다.

 

이 안택은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도 실시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정초에 많이 실시한다. 이는 하루라도 속히 무사함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안택은 새해를 맞이하여 당 년의 무사태평을 비는 만큼 정성껏 거행해야 하며, 따라서 부정을 피해야 함으로 외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즉 대문밖에 황토 세 무더기를 쌓아놓고 문 위엔 금줄을 쳐서 출입을 막았다. 안택은 가정주부가 비손으로 실시하는 것과, 판수나 무당을 불러 행하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리 지방에서는 주로 판수에게 맡겨서 실시한 예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이 같은 민속도 거의 사라진 것 같다.

 

  

7. 용왕제(龍王祭)

 

땅에는 지신(地神)이 있듯이 바다에는 해신(海神)이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인간 관계의 모든 화복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특히 우리 태안은 반도임으로 3면이 바다에 접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생활터전이 바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어민들은 해신을 유력한 신으로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박에 의한 고기잡이를 비롯하여 그물(그무질)  사둘질(사두질)  살(漁箭)  돌살(독살) 등을 이용한 어로(漁撈), 썰물 때 바다에 나가 미역과 우뭇가사리 등등 각종 해조류(海藻類)를 채취하고 또한 낙지  게  조개  고둥 등 실로 다양한 해산물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난날의 농어민에게는 바다가 생활터전의 전부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으니, 그들이 바다를 소중히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촌에서는 어로작업의 안전과 개인의 구복을 위해 연초에 지성으로 용왕제를 지냈던 것이다.

 

지금은 이 같은 풍속도 거의 사라진 것 같으나, 배를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는 지금도 출어(出漁)전에 뱃고사는 지내고 있는 것 같다.

 

 

8. 장승제(長丞祭)

 

이 장승은 긴 통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기이(奇異)하게 새겨서 붉게 칠하였는데, 하나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또 다른 하나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란 글씨를 파서 마을의 입구에 세운 것이다. 이는 마을이나 성(城)을 수호하는 신이라 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장승제라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장승제를 지내는 것은 악성전염병을 예방하는 동시에 모든 재난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데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장승은 거리를 표시하는 이정표(里程標)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즉 장승을 10리나 5리의 간격으로 세워두어 길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도 각 지역에는 옛날의 장승이 버티고 서 있음을 간간이 볼 수 있는가 하면 민속의 하나로서 이를 다시 복제하여 새롭게 세우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9. 성주제(城造祭)

 

성주란 집을 지켜준다는 신령을 말함인데, 집을 세로 짓거나 또는 이사를 하였을 때는 반드시 판수나 무당을 불러 떡시루를 해다 놓고 기원한 뒤에 백지(窓戶紙) 속에 동전을 넣고 동그랗게 접어서 방이나 대청의 대들보에 붙이고 이를 받드는 것이다.

 

특히 가을 추수가 끝나면 성주 앞에 떡시루를 해다 놓고 기원하는 풍습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 같은 풍속도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사라져간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10. 횡수막이,

 

이 횡수(橫數)란 말은 글자 그대로 뜻밖의 운수(뜻하지 않은 운수)란 뜻이요, 또한 막이란 막는다는 말로서 뜻밖에 닥쳐오는 재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즉 당해의 횡액을 막으려고 정월달에 무당이나 판수를 불러 실시하는 일정의 굿을 횡수막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횡수막이를 우리 시골에서는 흔히 홍수매기라고 부르는데 이의 어원(語源)은 어디까지나 횡수막이가 옳은 것이다. 즉 홍수매기란 횡수막이의 와음(訛音)이 것이다. 그러나 횡수막이란 원어(原語)보다는 오히려 와음인 홍수매기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민간인사이에서 전래되어 오면서 굳어버렸기 때문에 편의상 그래도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횡수막이의 방법은 가족 중에 당년에 횡수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횡수를 미리 막기 위해 무당을 불러 실시한다. 이때는 쌀 3되3홉에, 팥을 넣어 떡을 찌는데 3겹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소창지 3자 3치 짚신 3켤레 돈3냥을 준비하여 가지고 비교적 사람의 왕래가 많은 네거리에 가서 십자형으로 짚을 깔아놓고 그 위에 떡시루를 올려놓는다.

 

따라서 준비한 돈과 신발  채  실 등을 옆에 놓고 상위에 촛불을 켜 놓은 다음 무당이 북과 양판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왼다. 이때 당년의 액운이 있는 사람의 저고리 동정을 떼어서 불에 태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 한 해 동안 아무런 재액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횡수막이는 각 지역에 따라 실시하는 방법이 다르다.

 

어느 지역에서는 백설기  채  술  신 한 켤레  동정 한 개와 촛불을 켜놓고 실시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쌀 3되 3홉  팥을 넣은 3겹의 떡  소창지 3자 3치  신발 3켤레  돈 3냥 등 모두 삼자가 들어가는데, 이 삼(三)이란 한자어(漢字語)에는 끝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횡수막이를 실시하여 재액을 빨리 끝낸다는 뜻이다. 또한 붉은 팥은 벽사(壁邪)의 뜻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 같은 습속도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11. 조왕단지.

 

조왕(槽王)이란 부엌을 맡은 신을 말함인데, 고대의 미개인들이 믿던 다신교(多神敎)의 습속에서 연유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의 주변에는 많은 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터를 지켜주는 터주신이 있고, 또 집을 지키는 성주가 있는가 하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엌에는 조왕신의 상징으로 조왕단지를 갖추어 놓고 1년 동안 비우지 않고 계속 물을 채워두는 것이다. 그런데 각 가정에 따라 다르다. 즉 매일 아침 새로운 물로 갈아 놓는 집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조왕단을 만들어 놓은 가정도 있었다.

 

 

12. 고사(告祀)

 

고사란 개인을 비롯하여 온 집안이 재액(災厄)을 당하지 않고, 행운이 계속되도록 신령에게 기원하는 일종의 제사를 말한다. 이 고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속의 하나로써 지금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본래 고사는 가을철에 주로 지냈으며 또한 고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미리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보아서는 안되며, 경건한 마음으로 근신해야 한다.

 

따라서 대문 밖에는 대접 크기의 황토 3무더기를 만들어 놓거나, 또는 문 위에 금줄을 달아 외래인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이렇게 한 다음 고사를 지내는데, 고사에는 시루떡을 비롯하여, 채  과일  정화수 등을 차려놓고 조상신  터주신  성주신  조앙신  삼신 등에게 제를 올린다.

 

고사는 무당이나 판수를 불러 지내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가정 주부가 기원하는 예가 많다. 이와 같이 가정 내에서의 고사에는 주부가 중심이 되어 실시하지만 옥외서의 고사에는 남자가 관장하였다.

 

요즘도 고사의 명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실시 방법은 매우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앞에서 말한 전통적인 가정 내에서의 고사보다는 사업장에서의 고사가 수시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공장 운영이 잘 안되거나 또는 새 차를 구입했으면 차 옆에서, 선박을 가진 사람은 선박 등에서 각각 고사를 지내며, 회사의 번영과 무사고를 마음 속으로 비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의 고사에는 필연적으로 돼지머리가 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13. 고수레.

 

고수레란 판수나 무당이 굿을 할 때 또는 산에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그리고 남의 집에서 음식이 들어왔을 때, 그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귀신에게 바친다 하여, 음식을 조금씩 떼어 멀리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인데 지역에 따라 그 명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고시례  고시내  고씨네 등등 여러 가지로 불려지고 있다.

 

이같이 여러 가지 명칭이 있듯이, 따라서 그 어원(語源)의 유래가 다른데, 그중 하나의 실례(實例)를 들어보면, 일찍 단군조선(檀君朝鮮)때에 고시(高矢)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음으로, 그 은혜 보답하는 뜻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고시에 대한 예(禮)로써 음식을 떼어 던지면서 고시례하고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조선조시대 호남 지방에 고씨(高氏)라는 후덕한 지주가 있었는데, 소작인의 어려운 실정을 감안하여 소작료를 감하여 주는 등 후대하였음으로, 그 후 농민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고씨에 대한 고마운 뜻으로 먼저 음식물을 떼어 고씨례하고 던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說)들이 있으나 본래는 전자의 고시례(高矢禮)였는데,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고수레로 굳어져 우리말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일설에 따르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음식물에는 잡귀가 붙어 있음으로 먹기 전에 일부를 떼어  버림으로서 이 잡귀를 쫓았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전한다. 지금도 이 같은 습속이 일부지역에 남아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14. 기우제(祈雨祭)

 

기우제란 가뭄이 심할 때에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가를 말한다. 즉 하지(夏至)가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고, 또한 밭곡식이 말라서 비가 오기를 기원한 제사이다. 기우제는 정부나 혹은 각 고을과 각 마을 등 전국 각지에서 행하여졌는데, 이때의 제주(祭主)는 왕이나 지방 관원 또는 마을의 장이 맡았던 것이다.

 

또한 불교계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에 용왕운우경(龍王雲雨經)을 외치며 비 내리기를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으며, 그리고 고려조 때에는 가물 때에 수시로 기우도량(祈雨道場)을 열었다. 특히 고려 충목왕(忠穆王)은 몸소 내전(內殿)에 기우 도량을 베풀었던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그 벌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물면 임금 스스로가 목욕 재계하고 정성 드려 기우제를 지내야 했던 것이다. 지금도 각 지역에는 옛날에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祈雨壇)의 유적이 남아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각 지방에 거대한 댐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지하수가 개발되어 있어 전천후 농사가 가능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15. 동신제(洞神祭)

 

동신제란 마을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에게 지내는 일종의 제의(祭儀)행사를 말한다. 동신제는 마을 전체의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따라서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마을 주민들이 합동으로 거행하는 제의형식인 것이다. 이 같은 공동 의식(儀式)을 통하여 부락민의 공동에 의식(意識)을 도모하고 아울러 단합을 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각 지방에 따라 명칭은 다르지만 동신(洞神)을 모시고 제의를 거행한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산신당  서낭당 등등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 충남 지방에선 주로 산신당을 모시고 제의를 행한 것 같다. 물론 동신제는 마을 전체의 공동 이익을 꾀하는 제의였지만, 마을 주민이 함께 이를 주관한 것이 아니고 주민 중에서 제관(祭官)을 선출하여 의식을 관장하였는데,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부정(不淨)이 없어야 했다.

 

따라서 선출된 제관은 외출을 삼가고 아울러 제관 집에는 외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최소한 보름 전에는 출입문(대문)앞에 황토를 3무더기 쌓아놓고 문 위엔 금줄을 달아 출입을 통제하는 등 금기(禁忌)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러나 제관은 물론 마을 주민이 모두 합심하여 금기를 지키고 부정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멀리 여행을 하였다가 그곳에서 부정한 것을 보았으면 동신제가 끝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등의 금기를 엄격히 지켜야 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일이 있었는데 동신제를 지냈을 경우에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마을 전체에 큰 화가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신제를 거행하는 형식은 유가제의(儒家祭儀)와 당굿 형식이 있었는데, 이는 각 지방에 따라 달라졌으며 또한 절차 및 그 형식도 다소 차이가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요즘도 지역에 따라 동신제가 실시되어 오고 있지만, 그 절차는 매우 간소화되어 변형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실례를 찾아보면 태안에서 정월 열나흗날 밤에 남문리 2구에서 지내는 노신제와 그리고 경이정(憬夷亭)에서 지내고 있는 중앙대제가 그것이다. 본래의 동신제와 오늘의 그것을 비교한다면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오늘날 동신이 존재한다면 노여움을 사서 큰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16. 태안중앙대제(泰安中央大祭)

 

이 중앙대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태안의 경이정에서 거행되는 제례를 말한다. 이 대제가 이곳에서 거행되기 시작한 것은 23년 전인 1972년부터인데, 그 기원은 산신제에서 기인된 것이다. 백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태을암과 마애불상이 있는 중간 지점인 차도 위 벼랑 밑 편편한 곳에 산신당을 짓고 매년 정월에 지성으로 산신제를 지내왔으나,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탓이었는지 산신당의 퇴락(頹落)으로 인하여 제례의식이 지난 1936년에 중단되었다가 그 후 36년 만에 다시 부활되어 오늘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1972년 태안읍 내에 거주하는 남자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숙의한 끝에 산신제를 다시 지내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옛날같이 산신당을 짓고 그 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 아니라, 명칭도 중앙대제로 개칭하고 장소도 경이정에서 지내기로 합의하고, 당년부터 노인들이 제물을 준비하는 등 모든 제의 절차를 주관하여 수년(4년)간 내려오다 젊은 사람들이 이를 인수받아 지내고 있다. 즉 동 남문리 이장들이 맡아서 주관하고 있다.

 

제의 절차를 살펴보면 경이정의 마루에 자리를 깔고 병풍을 친 다음 큰상에 제물을 차려놓고 3헌과 독축으로 끝나는데, 초헌관은 읍장  아헌 종헌은 각 기관장이 행한다. 그리고 모든 제물은 이장들이 준비하고 주관한다. 그러나 제례 의식은 본래의 원형과도 많이 변형된 이른바 현대식의 편리 위주로 변질된 느낌을 찾아볼 수 있다.

 

 *축문(祝文)

 

 維

 歲次干支某月干支朔某日干支

                初獻官 邑長(혹은 郡守)

                亞獻官 機關長(平統委員)

                終獻官 里長(老人代表)

 敢昭告于

 天尊地下 中央大將軍 神位前

 國泰民安 時和年豊

 子孫榮貴 和合發展

 管內數萬人口 患難救濟

 疾病退治 安禍太平

 謹以淸酌 庶羞祗薦

 伏願伏祝 尊獻

 尙     饗  

 

  

17. 태안노신제(泰安路神祭)

 

이 노신제는 태안읍 남문리 2구 회관 마당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저녁 이장을 비롯하여 부락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행되고 있었는데,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본래 태안읍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방에서 거행하였는데, 동문리 1구는 샘골 입구의 여우내 다리 앞, 동문리 2구는 태안 극장 입구 충청은행 앞, 남문리 1구는 환동 입구 외곽도로 4거리 앞, 그리고 남문리 2구는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 입구인 브러크공장 근처에서 각각 노신제를 거행하였으며, 따라서 제사 장소는 간이 시설로 매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즉 4귀퉁이에 긴 말뚝을 박고 밀짚방석으로 가린 다음 자리를 깔아 상을 차려놓고 제례를 거행하는데, 제물은 대략 주(酒)  과(果)  포(脯)  채(菜)를 비롯하여 시루떡을 통째로 놓고 이장이 주관하여 거행하였다. 이렇게 1948년까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노신제를 지내왔으나, 정부 수립 후 미신 타파 운동 등으로 인하여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중단된 채 30여 년 내려오다 지난 1980년부터 부활되어 거행하고 있는데, 지난날과 같이 동서남북의 4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남문리 2구만 리(里) 회관의 마당에서 거행하고 있다.

 

제례 장소는 옛날과 같이 3면이 밀짚 방석으로 가리고 자리를 깐 다음 상을 놓고 제물을 진설하는데, 이 제물은 모두 두 이장이 책임지고 마련한다. 제례 절차는 3헌과 독축으로 끝나는데 초헌관은 마을의 영좌, 아헌관은 이장, 종헌관은 새마을 지도자가 행한다.

 

이들 제주(3헌관)는 노신제를 지내기 위해 10일간 집에서 근신하고 있다가, 목욕재계한 다음 제례에 임한다. 근신이라고 하지만 옛날과 같이 외출도 육식도 삼가며, 부정한 것도 보지 않고, 또한 행하지도 않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근신이 아니라 형식성의 근신인 것이다.

 

(이 태안노신제는 1987년부터 태안중앙대제에 합치고 중단되었다.)

 

*축문(祝文)

 

歲次丙寅正月甲申朔十五日戌閑良趙正男敢昭告于

黑帝大將軍

帝命將軍 五行往水 獨制一面

化行千載 殿我北方 四時行冬

興接三隣 威伏白神 儼臨周行

遙護環境 蔭德彌彰 玆値歲新

郡닉진屛 諸妖不休 宜功洋溢

敢獻淸酌 掃彼千災

천麥豊稔 歲歲年年     

神其格事 황余百福

려疫消滅 民歌樂只

尙     饗  

 

이 축문은 1986년도에 사용된 것이다.

 

  

18. 황도당제(黃島堂祭)

 

이 황도당제란 본 군의 안면읍 황도리(安眠邑黃島里)에서 매년 음력(陰曆)으로 정월 초순에 거행되는 대동제(大同祭)를 말하는 것이다. 황도는 본래 섬이었는데 지난 1979년에 육지(창기리)와 연륙교(連陸橋)가 가설되어 지금은 섬으로서의 실감이 나지 않지만, 매년 당제가 거행되고 있음으로 이곳의 지명을 붙이어 편의상황도 당제라 부르고 있다.(실은 지명을 생략하고 당제라고 부르는 것이 예사이다.)

 

이 황도리에는 큰 마을  은거지  집너머  살마곰 등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민가 약 100여 호에 인구 5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황도리에서 거행되는 당제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점이 있다. 즉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뱀(巳神)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본래 당집의 안에는 뱀의 그림을 붙여 놓고 이를 신봉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마을의 일부 청년들이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이를 제거하여 불에 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뱀이 그려져 있는 부분은 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나타나 마치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고 즉시 땅 속에 묻어주었다는 사실이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황도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 그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주 정씨(羅州鄭氏)와,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최초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황도에 정착하게 된 정씨와 오씨는 서로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자기 씨족들이 한데 어울려 생활하면서 그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정씨는 큰 마을, 오씨는 은거지에 각각 당집을 짓고 매년 정초에 당제를 극진히 지내왔는데, 오씨들의 가세(家勢)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 그들의 당집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때 오씨들은 문중 회의를 열고 합의한 끝에 당집을 다시 세우지 않고 정씨들의 당집에서 함께 당제를 지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당집이 그 동안 몇 차례 중수는 하였지만 근원은 정씨들의 당집이 되는 셈이다. 이 당집은 당산에 조영되었는데, 3.4평에 불과한 목조 건물과, 두 평 미만인 초라한 산신당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당집의 주위에는 수령(樹齡)수 백년을 자랑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이 당집의 역사를 실증해주고 있다. 지금도 매년 정초에 이 당제가 거행되고 있으니 참고로 하기 위해 당제의 절차를 약술하여 둔다.

 

당제를 주관하는 제주를 달리 당주라 부르고 또 이 당주를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을 화주라 하는데 이들은 주민들이 선출하는 것이다. 즉 당주는 음력 섣달 보름에 당제 준비를 위해 열리는 대동계에서 선출한다. 그러나 이 당주는 아무나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당주로서의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일단 선출된 당주는 여러 가지 금기 사항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자가 당주가 되어 이 당제를 주관하였을 때는, 당주는 물론 마을 주민들이 모두 신령의 화를 입어 불행해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당주는 이 금기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당주는 당제를 무사히 끝낸 뒤에도, 다음 해의 당주가 선정되기 전에는 역시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이 이 황도 당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제를  마친 당주가 1년 동안 온갖 부정한 것을 보아도 안 되며 또한 행하여도 안 됨은 물론, 심지어 자기 집의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문 위에 금줄을 달아 부정한 외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본인도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야 하는 등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에, 이 당주를 선출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황도의 당제가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져 여전히 거행되고 있지만, 본래의 절차에 따라 엄격히 거행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해방 전까지 당제 의식이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어 이미 정월 초이튿날 아침이면, 당주  화주  집사자들이 모두 당집에 올라가 준비한 제물을 정성 들여 진설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물을 진설하고 나면 자정에 이르게 되는데, 실은 이때부터 당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선 강신무에 의해 신령의 초청이 끝나면 곧 이어 당주에 의해 술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는 절차 등으로 당제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당제의 의식 절차가 끝나는 동시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10여명의 무격(巫覡)들이 굿을 시작하는 것이다. 10여명의 무격들이 모여 굿을 하게 됨으로 대성황을 이루게 되는데, 이때는 마을 주민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도적(擧島的)으로 모두 참가하여 축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간다. 무격들의 열두거리 굿을 다 마치는 등 설레다 보면 4일간의 축제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같이 4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마지막 절차로 산신당에 가서 산신제를 간략하게 지내고 모두 끝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도 이 당제는 주민들에 의해 여전히 거행되고 있지만, 본래의 당제와는 거리가 먼 형식만으로 그치고 마는 것 같다.

 

즉, 정월 초이튿날 저녁에 당주와 집사자가 당집에 올라가 제물을 진설하여 놓고 자정 무렵에 제의(祭儀)를 마친다. 그리고 새벽녘에 산신제를 지내고 하산함으로서 당제가 모두 끝나는 것이다. 이 당제가 과학의 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것을 시사(示唆)하여 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우리 민속의 뿌리가 시들지 않고 오늘에까지 뻗어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래 황도당집에는 뱀 신을 모셨으나, 앞에서 말 한대로 소실되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어로 신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이곳 황도당집에서도 임경업 장군 신을 모시게 된 것이다. 황도당집에는 12신장을 비롯하여 성주  3불  장군신을 모시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임경업 장군이 주신(主神)인 것이다.

 

  

19. 가의도 당제.

 

이 가의도는 근흥면의 가의도리에 있는 섬인데, 근흥면에 딸려있는 23개의 섬 중에서 제일 큰 유인도(有人島)로서 그 면적은 10,82이다. 안흥 항에서 서쪽으로 약 9km쯤 떨어져 있는 낙도인데, 안흥에서 12노트의 속력으로 달리는 45톤급 철선인 새마을2호 여객선을 타면 30여분 뒤에 섬에 이르게 된다.

 

가의도의 당집은 큰말(大村)의 뒷산인 당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20년 전에 개축한 스레이트 지붕의 시멘트 벽돌집이다. 집의 크기는 길이 5.70m 폭 2.20m로 이루어졌는데, 앞에는 돌담을 쌓고 주변은 소나무(赤松)와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당집이다.

 

이 당집은 제청(祭廳)과 부엌으로 되어 있는데, 부엌에는 당제에 쓰는 여러 가지 제구(祭具)와 2개의 솥이 걸려있고, 제청에는 제신(祭神) 대신 9개의 번호 판 위에 각각 백지가 걸려있다. 이 백지의 크기는 길이 70m, 폭 20m의 것을 5 넓이로 네 번 접은 다음 다시 구부려서, 벽에 붙어있는 번호 판의 못에 걸어 놓고 또 종이 밑에는 어른 손가락 크기의 쇠간이 지푸라기에 묶인 채 걸려있다.

 

이 번호 판은 나무로 만든 것인데, 세로 8, 가로 3, 두께 5mm로 되어있다. 이 나무판 위에 붓글씨로 한자(漢字)를 一에서 九까지 써서 3면의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해 놓았는데, 방문에서 앞쪽을 향해 좌측에는 4개 전면에는 3개 그리고 우측 벽에는 2개의 목판이 붙어있다. 그런데 이 번호 판이 一, 二, 三의 순서대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좌측 벽의 앞에서부터 五, 二, 一 , 六과 전면 좌측에서 七, 八, 九 그리고 우측 벽에는 앞에서 四, 三의 순으로 붙어있다.

 

그리고 이 당제에 쓰는 제수(祭需)로는 소머리(전에는 통소)를 비롯하여 쇠간  천엽  메  술  삼색실과 등인데, 이 제수의 진열은 방 중앙에 소머리를 놓고 좌우 앞의 번호 판 밑에는 제수를 진열해 놓는다. 진열 순서는 一번에서부터 시작하여 九번에서 그치는데, 이때 四번만은 쇠간을 달아놓지 않는다. 또한 당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당주 1명, 화장 1명, 동사 1명(전에는 2명)의 남자들로 구성한다. 이들은 마을의 대동회에서 선출하는데, 이는 아무나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선정한다.

 

일단 선출된 제관은 초하루부터 도가 집에 모여 근신하는데 초이튿날은 당집에 가서 말끔히 청소하고 초삼일은 우물에 목욕재계한 다음 당집에 가서 당제를 지내는데, 메를 3번 짓고 4번 제사를 지낸다.

 

첫 번째는 저녁 10시, 두 번째는 11시, 세 번째는 12시에 지내고 마지막 4번째는 뜰제라 하여 초사흘 새벽에 지내고 하산한다. 이 뜰제는 제청에 진열했던 제수를 마당에 모두 내놓고 3사람이 함께 제를 지낸다. 이렇게 해서 당제가 모두 끝나면 제물을 챙겨 가지고 도가 집에 와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당제는 끝난다.

 

이 가의도 당제는 지금도 매년 거행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서해안 지역에서 거행되던 대부분의 당제가 어로 신으로 임경업장군의 영정을 안치하고 음력으로 정초에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이 가의도 당제는 제신 없이 목판을 걸어 놓고 연말인 섣달의 초삼일을 정해서 거행하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갯마을 3,4월호 1994에서.)

 

  

20. 석전제(釋奠祭)

 

석전이란 성균관을 비롯 각지방 향교에서 병설한 문묘(文廟) 즉 대성전에 공부자(孔夫子)를 주인공으로 하여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네 분의 성인과 공자제자 10철(哲) 송나라 6현(賢)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올리는 제사의식을 말함이나 만세종사(萬世宗師)인 공자께서 남기신 인의도덕의 이상(理想)을 근본으로 삼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천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리를 천명함에 있어 스승을 받들고 성현을 흠모하는 예로써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희생(犧牲) 폐맥 단술 등 생것으로 된 제수를 올리고 집례(사회자)의 창홀(唱笏)에 따라 전폐(奠幣) 삼헌(三獻) 분헌(分獻) 음복(飮福) 망료(望燎)례의 순으로 진행 고아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신 듯이 엄숙 경건히 봉행함을 석전이라고 한다.

 

이는 옛부터 국가에서 주관하는 오례(五禮)중에 길례(吉禮)편에 속하는 전통적 국가행사(무형문화재 85호)로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1개 향교에서 동시에 일제히 거행하고 있다. 그리고 인근의 서산향교와 해미향교의 봉사위폐는 각각 25위로서 그중 18위인 한국인 7위가 중국인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태안향교는 39위를 봉사하고 있다. 39위 중 18위가 한국인 21위가 중국인으로 오히려 외국인의 위폐 수가 많다. 이는 성균관 봉사위폐와 같은 것이다.

 

 

출처: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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