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유적

전남 진도. 이충무공 전첩비(李忠武公 戰捷碑)

백산(栢山) 2013. 8. 13. 16:34

 

이충무공 전첩비(李忠武公 戰捷碑) 전경.

 


건립일시 : 1956년 11월 29일.
지정일시 : 2001년 10월 30일.
지정번호 : 향토유형유산 제5호.
비석규모 : 가로14m, 세로18m 넓이, 11m 높이.
소 재 지 :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
안내번호 : 061-540-3139.

 


이충무공 승전전첩비는 진도읍에서 동편으로 12km 떨어진 벽파항 즉, 고군면 벽파리 682-4번지에 위치한 이 비(碑)는 1956년 11월 29일 제막식을 가졌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걸작의 글씨를 남겼다.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건립되었다.

 

비문(碑文)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새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 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 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 7일 적선 18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甘浦島)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 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진(津)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 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이곳 벽파항은 1984년 진도대교가 놓여지기 이전만 하더라도 진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으며, 명량해협의 길목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진도 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워졌으며,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 대한 당시의 역사(歷史)가 적혀있다. 일본 대마도를 굽어보며 장엄하게 세워진 이 비석은 가로 14m, 세로 18m의 넓이로 암석을 다듬고 석축을 쌓아 이충무공의 넋을 담고 있으며 11m의 웅장한 높이를 지니고 있다.

 

또 비석의 주추는 2.72m의 길이에 3.33m의 폭과 1.81m의 높이를 한 거북이는 바위를 깎아 만들어 그 등허리에 비석을 세웠다. 머리에는 쌍용이 휘감은 채 양편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데 높이 1.21m, 가로 2.12m, 세로 1.21m로 9톤이나 되는 중량을 싣고 있다. 아침이면 햇살이 비쳐 눈이 부시고 석양이면 비석의 그림자가 바닷물까지 와 닿는다.

 

 

본문 출처: 진도군청 홈페이지.

 

이충무공 전첩비 안내판.

 

 

진도 벽파항 부근에 설치된 이충무공 전첩비 안내문과 체육시설.

 

성웅 이순신장군 기념비 안내문.

 

성웅 이순신장군 기념비 안내문.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에 자리한 이충무공 전첩비 전경.

 

이충무공 전첩비 안내문에서 돌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니 쉼터 정자가 보인다.

 

옛 벽파진항의 모습이다.

 

벽파진항 건너편에 갑부도가 보인다.

 

벽파마을에 펼쳐진 양식장이다.

 

벽파마을의 펼쳐진 양식장과 농토.

 

이충무공 전첩비가 가까워진다.

 

이충무공 전첩비의 위용.

기단은 거북형상으로 되어있다.

 

전첩비 뒤편에서...

 

전첩비 측면에서...

 

전첩비 측면에서...

거북형상의 기단 위에 전첩비가 세워져있다.

 

전첩비 뒷편에서...

 

전첩비 뒷편으로 산책로가 개설되어있다.

 

 

탐방: 2013년 6월 6일(현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