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 像.
1926년 8월 4일 김우진은 그와 예술적 애정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 도꾜 우에노 음악학원 출신이자 <死의 찬미>를 불러서 국내외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尹心悳)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연락선에서 현해탄으로 투신정사(投身情死)하였다.
그때의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지식인의 어처구니없는 종말에 대해서 반신반의와 무책임한 처사에 대한 질책으로 보도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는 노부모와 아내 정(鄭)씨 부인과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엄연한 회사의 대표이고 엄청난 재산가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웅변해 주듯이 그에게는 <사회개혁>이라고 하는 대철학이 엄존했었고 할 일도 많았을 그가 더욱이 29세라고 하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 나이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원인을 그의 작품세계에서 찾으려는 연구가 여러 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시대적인 고민과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로 일단락이 된 것이다.
김우진 생애와 문학 전시실.
아들의 돐날에 딸과 함께...
둘째 남동생 익진(1906~1970)과 함께.
오늘날 와세다 대학교의 전경.
일제시대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왕래하던 부관연락선.
김우진이 관극평을 쓴 축지소극장의 <인조인간> 무대(1926.7)
일본 신극운동의 주무대였던 축지소극장 터.
동우회 순회극단 단원들(파고다 공원에서 1921)
병풍식으로 진열된 작품 소개.
김우진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약력.
1897년대.
1920년대.
1923년~1926년.
1926년대.
윤심덕(尹心悳, 1897~1926).
본관 파평(坡平). 평양 출생.
1918년 경성여고보(京城女高普)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관비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그후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음악회에 출연, 성악가로 명성을 떨치고 1925년 토월회(土月會) 배우로 활약하다가 유행가수로 전향하여 방송에 출연하는 한편 레코드를 취입, 특히 《사(死)의 찬미》로 인기를 끌었다.
1926년 레코드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 갔다가 귀국길에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 위에서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하였다.
*본문 중 일부는 웹사이트 및 <목포문학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글, 그림 / 이태원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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