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량 장군 신도비
(崔希亮 將軍 神道碑)
전라남도 기념물 제53호.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369번지.
최희량 장군 신도비 안내문.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인 최희량 장군을 기리고 있다.
최희량(1560∼1651)은 35세 되던 선조 27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흥양현감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큰공을 세웠으며, 적의 포로로 있던 신덕희 외 700여 명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지내다 효종 2년(1651)에 생애를 마쳤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광무 5년(1901) 장군의 후손들이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송치규가 글을 짓고, 여기에 송치규의 자손인 송지헌이 글을 덧붙여 기록하였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최희량 장군 신도비 상단에 증병조판서로 되어있다.
최희량 신도비문.
옆에서 본 최희량 신도비.
최희량 장군 신도비각.
충의문(忠義門)
무숙사 외삼문.
최희량의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신도비가 있는 나주군 다시면 가흥리에서 태어났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때 흥양현감으로 이순신 아래에서 큰공을 세웠다. 또 적에게 포로가 된 신덕희(申德希) 외 700여 명을 생환시키기도 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냈다. 1604년에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의 훈작이 내려졌다. 그 뒤 1774년(영조 50)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한편 최희량이 전쟁의 성과를 적어 보낸 문서와 회답으로 받은 문서를 한데 모은 《임란첩보서목(任亂捷報書目)》이 있는데, 1979년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다. 1984년 사우인 무숙사가 건립되었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별첨> 최희량장군의 후손되시는 분께서 최희량장군은 수원최씨가 아니라 수성최씨라는군요.
그 내용은 본 게시물의 답글 중에 수돌이 님의 답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선생유허비(三先生遺虛碑)
삼선생유허비(三先生遺虛碑)
무숙공 최희량장군 묘정비.
무숙사정화기념비.
성금비.
충의문(忠義門)
여견재(如見齋)
여견재(如見齋) 현판.
무숙사(武肅祠)
최희량 장군 묘지.
무숙사 뒷편에 자리하고 있다.
곱게 단장된 최희량 장군 묘역.
최희량 장군 묘지.
탐방: 2015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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