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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 창녕조씨 삼강정려(昌寧曺氏 三綱旌閭)

백산(栢山) 2015. 11. 24. 11:03

 

 

창녕조씨 삼강정려(昌寧曺氏 三綱旌閭)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

 


*소재지: 광주 광역시 광산구 용진로 219 (북산동 450-1) 

 

 

창녕 조씨 일가 4대의 충(忠), 효(孝), 열(烈) 행정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로써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忠), 그의 손자 조순악과 증손자 조후건의 효(孝), 며느리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열(烈)을 기리는 정려(旌閭)이다.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이라고 합니다.

 

성씨를 얻은 설화지는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이라는데요, 전설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가 붉게 씌어있어 소문을 듣고 왕이 성을 조씨, 이름을 계룡이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광주 세거는 언제부터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과 손자 조순악, 증손자 조후건의 효, 며느리 문화 유씨의 열을 기리기 위해 1897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1923년 건립한 것입니다.

 

먼저 조언수(曺彦秀)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장군의 우장군으로 금산전투에 참전해 순국한 분으로 병조참판에 추존되었습니다.

 

임곡동에 삼강정려를 세우면서 조언수를 기리는 제각 명덕재(明德齋)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광주 서구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조언수는 1876년(고종 13) 황해도 암행어사 문학, 시강원 겸 사서, 부응교, 부교리, 승지 등을 역임하고 1880년 순천 부사에 재임했던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2)이 쓴 '창녕조씨 삼강유적기(昌寧曺氏 三綱遺蹟記)'에서 "선조 임진왜란 당시, 송암 조언수의 공은 포의로서 떨치고 일어나서 대중을 고무시켜 군사를 모집했다. 나중에 조중봉(趙重峰), 조헌趙憲, 1544~1592) 선생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국하여, 포상으로 아경(亞卿)에 추증되고 곧 맹부(盟府)에 공훈이 실렸다" 라고 적혀 있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적기에도 "공의 아들 참봉(參奉) 조성복(曺成福)의 부인인 숙부인(淑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는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를 베었으며, 남편이 죽자 맹세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자식을 가르쳐서 가정을 이루게 하고, 죽은 남편의 뜻을 이루었기에 정려(旌閭)의 포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인의 아들 통정(通政) 순악(舜岳)은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효행에 감응하여 물고기를 얻는 이적(異蹟)이 일어날 정도였기에 고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일을 칭송한다. 순악의 아들 후건(厚建) 또한 효로 이름났다. 삼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어사가 포상을 내려 주십사 아뢰어준 덕에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씨 집안에는 정려문이 이어져 백년 동안이나 전해졌으며, 또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창녕조씨 삼강정려 안내판.

 

 

 

삼강정려 중수중건비기.

 

 

 

창녕조씨 삼강정려 외단문.

 

 

 

삼강정려각 전경.

 

 

 

<충신 증가선대부병조참판 조언수지려>라고 쓰인 정려.

 

아래 편액은 "창녕조씨 삼강정려기"이다.

 

 

 

<효자 증통정대부 조순악지려>는 조언수 손자이다.

 

 

 

<효자 행동몽교관 조후건지려>는 조언수의 증손자이다.

 

 

 

열부 행 목릉참봉 조성복 처 숙인 문화유씨지려.

 

조언수 아들 조성복 처 문화유씨의 열을 기리는 정려.

 

 

 

삼강정려 내부.

 

 

 

창녕조씨 삼강정려 전경.

 

 

 

탐방: 2015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