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전남 함평. 영파정(潁波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68호.

백산(栢山) 2016. 10. 24. 09:00

 

 

영파정(潁波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68호.

1988.12. 21.


 

전남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6-2.

 

 

 

세조 1년(1455)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영파정 이안(1414∼?)이 자신의 호를 따 지은 건물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1450∼1460년대로 추정한다.

 

그 후 영파정은 함풍 이씨 가문에서 관리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유재란(1597) 중에 불에 타 없어진 후 영수정이란 이름으로 다시 지었으며, 1820∼1821년 사이에 군수 권복과 김상직이 현재와 같은 규모로 지었다.

 

그 뒤 고종 20년(1883) 크게 보수하고, 1966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안쪽은 좌우측 1칸만 온돌방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깐 대청으로 설계하였다.

 

창문은 대청 뒷면과 옆면에 쌍여닫이를 설치하고 앞면은 3짝 모두 들어 열 수 있는 문으로 하였으나, 현재는 유리를 끼워 놓았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이안(李岸) 호(號)는 영파(潁波)

 

1414~ ?. 자는 야부(野夫). 호는 영파(潁波), 본관은 함풍, 시조(始祖)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광봉(光逢)의 9세손이며, 경복궁 제거 유(柔)의 둘째 아들로 충남 천안의 직산리(稷山里)에서 태어났다. 19세인 때인 1432년(세종 14)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행의(行誼)또한 성학정신(聖學精神)에 투철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정통하였다.

 

1454년에 박팽년(朴澎年)이 효 겸 학행으로 천거하여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고 단종이 1455년 윤 6월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니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처조카인 신말주(申末舟,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와 낙향길에 올라 말주는 전북 순창(淳昌)에 머물고 그는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와 당시 정양동(井陽洞, 현 함평읍 기각리 구기산)의 냇가에 영파정(潁波亭)이란 정자을 짖고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둔하였으니 중국의 고사에서 나오는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청풍고절(淸風高節)을 잇기 위한 것이었다.

 

후에 대천(大川)으로 불리던 냇은 영수(潁水)가 되고 정양동(井陽洞)의 뒷산은 기산(箕山)으로 불리어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티 없이 맑게 살았던 기산과 영수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정유란 때 그의 행록, 유문(遺文)이 모두 불타 없어져 그의 학문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며 유일한 유고 “제영파정(題潁波亭)”의 일부가 전한다.

 

 

[참고문헌] 함평군사

 

 

 

영파정 안내문.

 

 

 

영파정 편액.

 

 

 

파정은 현판이 2개이다.

영파정(潁波亭) 편액 외에도 영수헌(潁水軒)이라는 현판이 또 하나 있다.

 

 

영파정 현판을 쓴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은 전라북도 김제(金堤) 출생으로, 호는 강암(剛菴).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의 아들이다. 일찍이 한학(漢學)에 입문하여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으며, 서법(書法)과 그림에 취미를 가져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과 범절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보발(保髮)을 고집하고 양복(洋服 )을 입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과 신학문을 반대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서법에 있어서 그는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으며, 그림은 문인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제자들이 많았는데, 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암일대전(剛菴一代展)을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영파정(潁波亭)

 

출입문이 잠겨있어 담장 밖에서 촬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수정중수기(潁水亭重修記)                          관덕정중수기(觀德亭重修記)

 

영파정은 한 때는 수정과 관덕정으로 불리면서 함평군의 활터와 정자로 쓰이기도 했었다.

 

 

*2016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