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강진. 양건당 충효사적비와 의마총

백산(栢山) 2017. 10. 18. 09:00

양건당 황대중 충효사적비.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436-5.

 


양건당(兩蹇堂)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은 양정공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이며, 황윤정(黃允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효건(孝蹇)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성장해서는 참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로 뽑혀 전투에 참여했으며, 병사 황진(黃進, 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이 함락될 때 성을 빠져나온 그는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이순신의 진중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총탄이 오른쪽 다리를 관통하여 다리 일부를 절개했다.

 

그는 1597년 8월 16일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남원읍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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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건당 황대중 충효 추모비 비문.

 

 

효도도 어렵고 충성도 어렵거늘 하물며 충효를 쌍전함에는 얼마나 어려우랴. 우리 중조(中祖) 양건당 부군(府君)은 어려운 충효대도를 위하여 신명을 아낌없이 바쳤으니 참으로 민족 천재의 거울이요 자손 백세의 자랑이다. 부군의 휘는 대중이시오 자는 정숙(正淑)이시니 조야에서 이름 높으신 이조(李朝) 현상(賢相) 익성공 방촌 휘 희(喜)의 5대손이며 부위(副尉) 윤정(允禎)의 2남으로 명종 신해 단기 3884년에 백동 경저(栢洞京邸)에서 출생하시었다. 덕성에 학문을 겸하니 사림의 추앙이 높았다.

 

일즉 자당 진주 강씨께서 중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이매 심히 근심한 나머지 자신의 고육(股肉)을 오려 약(藥)하여 바치시니 창천이 감동하여 친환(親患)은 치유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좌편 다리를 절게 되니 세인은 이르되 효건(孝蹇)이라 칭하였다.

 

효명(孝名)이 주달되어 정릉 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노친을 봉양키 위하여 부임을 사양하였다.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충분(忠憤)을 못 이기어 자진 출전하여 도처에서 수훈을 세웠으며 유명한 한산도전의 이충무공진에서 선두에서 지휘타가 적탄에 맞아 우편 다리를 절게 되니 세인은 이르되 충건(忠蹇)이라 칭하였다. 오호라 정유재란에는 불구의 몸으로 출전하여 포위 당한 남원 고성(孤城)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니 때는 정유 8월 16일이니 향년 47세였다.

 

조정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증하였다.
천고에 아름다운 양건의 당호는 세인이 부군의 충효를 감탄하는 애칭의 아호이다. 성산의 선영에는 사시에 향풍이 감돌고 구암(龜岩)의 고묘(古廟)에는 만년 창태가 아롱져있다. 우리들은 사백 성상 충효의 청전(靑氈)을 이어온 고가(古家)의 후예인지라 거룩한 조업을 각골명심하여 충효의 가성(家聲)을 천만대에 보전하리다.

 

 

단기 4307년 8월, 13대손 의권 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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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마총(義馬塚)

 

황대중은 남원읍성에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았다.
 
이를 보고 달려온 전우 김완 장군에게 칼을 주면서 그 칼을 가지고 적을 무찌르고 나의 시체는 거두어 나의 말에 실어주면 집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김완 장군이 그대로 하니 말은 시신을 싣고 가족이 있는 구승리(龜昇里, 지금의 용상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주민들은 그의 시신을 성묘산에 안장했는데 그의 나이 47세였다.

 

말은 그로부터 1년 후에 죽었는데 가족과 주민들이 이곳에 묻고 관리하고 있다.

 

2007년에 황대중의 후손들이 애마석상(愛馬石像)을 건립했다.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204-5에 자리하고 있는 의마총(義馬塚)은 2004년 11월 1일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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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녁에 조성된 의마총.

 

 

의마총.

 

 

의마총과 양건당과 의마석상.

 

 

애마석상 건립비.

 

 

양건당 애마지총 비석.

 

 

 

 

척동마을 입로석.

 

 

201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