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장흥. 존재 위백규선생상

백산(栢山) 2018. 4. 9. 09:00

 

전남 장흥. 존재 위백규선생상(存齋 魏伯珪先生像)

 

 

전남 장흥군 장흥읍 충열삼거리.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상.

 

 

위백규(魏伯珪)

자화(子華), 존재(存齋), 계항(桂巷), 계항거사(桂巷居士)

1727(영조 3)∼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실학자.

대표작: 존재집, 정현신보, 사서차의, 환영지, 본초강복.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계항거사(桂巷居士).
장흥 출신. 할아버지는 위세보(魏世寶)이며, 아버지는 진사 위문덕(魏文德)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처음에 증조부에게 수학했으나 유년기를 지난 뒤에는 자수면업(自修勉業)하였다.
위백규는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를 탐독해 학문적 자세를 굳혔다. 향리의 장천재(長川齋: 장흥의 관산면 방촌리)에 기거하면서 면학과 교화의 일익을 담당했고, 1750년(영조 26) 학행으로 향천(鄕薦)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 스승 윤봉구(尹鳳九)를 만나, 그 뒤 1766년까지 경서·의례·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학문적 계도를 받았다.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그 뒤 1794년(정조 18) 68세 때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機張)·태인·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차례로 지냈다.

 

학통은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경전의 이해나 심성론·이기론에서는 전통 성리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현신보(政鉉新譜)』나 봉사류(奉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어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위백규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촌사회 개선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지방 교육 개선을 통해 향촌 질서의 유지와 교화뿐만 아니라 관리 선발, 지방 관리의 경제 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정치 기강의 해이와 이에 따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관제 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 부세론, 지방 관리 선도책 등을 구상하고, 셋째, 견실한 향촌 방위 체제를 주장한 점이다.

 

이 향촌사회 개선론을 일관하는 기본 구상은 향촌의 자율성 모색과 공의(公議)의 구현으로 집약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성과 공의 창달의 주도자나 중간 계층으로서, 사회의 견제 및 비판과 민중 옹호라는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세론 외에도 경학·지리·역사·의학 등에 관한 저술이 문집 『존재집(存齋集)』 22권 안에 망라되어 있어, 학문 폭이 매우 넓고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위백규에 대한 후인의 인물평이나 저술과는 달리, 교우 관계나 후학은 매우 소략하고 묘연해 밝히기가 힘들다. 이는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거의 전 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1805년(순조 5) 향리 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존재집』·『정현신보』·『사서차의(四書箚義)』·『환영지(?瀛誌)』·『본초강목(本草綱目)』·『고금(古琴)』·『격물설(格物說)』·『원류(原類)』·『연어(然語)』 등이 있다.

 

 

[Daum백과]

 

존재 의백규선생상과 조선총도.

 

 

존재 위백규선생상 표지석.

 

 

조선총도.

 

 

존재 위백규선생상.

 

 

2018.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