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지에 가려진 충효사(忠孝祠)
전남 강진군 대구면 정수사길 403.
*충효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사당이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있는데, 강진 충효사는 사찰 정수사 바로 앞 주차장 부근에 부속건물도 담장도 없이 달랑 사당만 갖추고 있다. 충효사 사당 앞에는 염걸장군의 전승기적비가 사당을 지키고 있다.
충효사
(忠孝祠)
정수사 주변 계곡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일본군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염걸 등 의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수사 주지 스님이 2003년에 정수사 입구에 염걸장군 전승기적비(파주 염씨 임란사충 전적비)를 세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염걸(廉傑, 1545~1598)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두 동생과 아들을 불러 나라의 위급을 구하는 길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는 길뿐이라고 역설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그는 의병 창의부대를 편성한 후 구십포 해안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후퇴하면서 적군을 정수사 앞 들판과 계곡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찌르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강진 등지의 바닷가 여러 고을 백성들은 염걸의 지략과 저항에 힘입어 오랜 기간 전화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그의 공로를 장하게 여겨 1597년 4월 그를 의병장으로 임명했다.
염걸(廉傑)은 부산 몰운대 전투에서 일본수군을 격파했으며 1598년 노량해전 때 도주하는 적선을 쫓아가다가 거제도 앞 바다에서 54세의 나이에 순절했다. 가족들은 그 해 11월에 의대(衣帶)로 초혼하여 장사를 지냈다. 염걸은 1605년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 웹사이트 -
충효사 현판.
둘레 담장도 없고 내,외삼문도 없이 달랑 사당 하나가 전부인 충효사.
파주염씨 임란사충 전적비.
破州廉氏 壬亂四忠 戰蹟碑.
퇴은당 염걸장군 승전기념비.
退隱堂 廉傑將軍 戰勝紀蹟碑.
염걸은 파주인(坡州人)으로 강진 칠량면 율변리에서 염인형(廉仁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강진에 왜군이 침입하자 구십포(九十浦)와 정수사에서 동생인 서(瑞)와 경(慶), 외아들인 홍립(弘立), 그리고 인근에서 모은 의병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여기에서 허수아비 수백 개를 만들고 포고문(布告文)을 발사하여 왜적이 이를 보고 후퇴하자 정수사(淨水寺)에 숨어 있다가 크게 무찔러 큰공을 세웠다.
이순신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싸움에 힘써 의병장이 되었고, 몰운대 전투에서 다시 큰공을 세워 수문장이 되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거제도해전에서 백병전을 펴다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그의 형제인 염서, 염경, 외아들 염홍립도 모두 전사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염걸장군의 묘소는 그의 동생인 염서, 염경 그리고 외아들인 염홍립과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파주 염씨 종중에서 관리한다. 묘소 아래는 후손들이 세운 순의비가 있으며 추모 제각이 있다. 그 아래에는 염걸장군의 생가가 있었으나 건물의 훼손이 심해 1981년에 철거하였다.
- 웹사이트 -
염걸장군 묘소 위치.
전남 강진군 칠량면 단월리 산61번지.
http://blog.daum.net/life112/4449
모충사(염서장군 사우)
전남 보성군 복내면 반석리 376-4.
http://blog.daum.net/life112/4670
2018.10.09.
전남 강진군 대구면 정수사길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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