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돌며

이른 아침에 찾은 목포의 명물. 갓바위

백산(栢山) 2019. 5. 20. 09:00

 

갓바위 표지석.

 

 

다녀온 날: 2019년 5월 16일 오전 5시 20분경.

 

 

 

간밤에 숙면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차로 5분거리에 있는 갓바위로 향했다.

목적은 아침에 떠오르는 일출을 촬영하기 위함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찬란히 솟아오르는 일출은 끝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침 일찍 맑은 공기에 여명이 밝아오는 모습으로도 기분은 어느 날 아침보다 좋았다.

 

 

 

전남 목포시 용해동 산 86-24.

 

 

 

목포의 명물. 천연기념물 제500호 갓바위 전경.

 

 

 

목포팔경 중 입암반조(笠岩返照)

 

 

입암산(갓바위) 문화의 거리를 병풍처럼 감싼다. 높이 120m의 갓을 쓰고 있는 바위 이름이 갓바위이다. 갓바위가 있어 갓바위산(笠岩山).

 

입암산(笠岩山) 저녁노을에 물든 바다와 입암산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 빛의 아름다움을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여 목포팔경 중 하나이다. 갓바위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이다.

 

파도가 치거나 안개가 끼면 표면이 연분을 함유한 물에 젖었다가 마르기를 수없이 되풀이  한다. 수분에 녹아있는 실리카 성분이 암석표면으로 이동된 후 거기에 침전되면서 딱딱한 바위의 표면을 형성하고 용해된 부분은 조직이 이완되고 강도가 낮아져 쉽게 풍화되어 멍이 생긴 것이다. 모자모양의 경질부와 아래쪽 움푹 패인 벌집 모양의 풍화혈이 형성되었다.

 

삿갓이 동남쪽을 향한 것은 햇볕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은 해식작용과 기계적 풍화작용의 영향으로 암석이 어떻게 해식, 풍화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지질학적 가치가 크고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자연학습장이다.

 


<목포시 홈페이지 참조>

 

 

 

갓바위 반영과 해상보행교.

 

 

갓바위에서 바라본 해상보행교와 영산강 하구둑.

 

 

 

갓바위 해상보행교.

 


목포시에서는 갓바위를 해상에서 직접 조망할 수 있는 보행교를 바다 위에 설치하여 2008년 4월 10일 개통하였다.

 

총연장 298m, 폭 3.6~4.6m의 물 위에 떠있는 보행교는 밀물 땐 약 1m 정도 왔다가 썰물 땐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목교 118m, 도교40m, 부잔교140m, 난간 등 부대공사와 보행교의 야간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야간엔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갓바위 앞 해상보행교가 개통됨에 따라 갓바위를 해상에서 직접 볼 수 있게 되어서 하당 평화광장으로 연결되어 해안도로를 따라 산책하기에도 그만이다. 단, 갓바위보행교는 태풍, 호우, 폭설, 안개 등의 기상악화 시에 출입이 통제된다.

 

 

<목포시 홈페이지 참조>

 

 

아침해가 찬란하게 솟는 일출을 보지 못했다.

 

 

천연기념물 제500호 갓바위 안내문과 전설.

 

 

천연기념물 제500호 갓바위 안내문.

 

 

갓바위 전설

 


갓바위에 대한 전설을 살펴보면....

 

"큰 바위는 '아버지 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하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지만 역시 아들바위의 삿갓이 보다 근사하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 거점으로 개항(開港)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榮山江河口)를 지키는 보잘것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갔다.

 

청년은 안타까운 마음에 스스로 큰 결심을 하고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 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가 집에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며 쫓아 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 마을을 지나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얼굴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예로부터 말(馬)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鞍裝)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墓자리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다 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지금 이곳은 이(李)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基의 墓가 들어서 있다. 고 전설을 들을 수 있다.

 

 

- 웹사이트 -

 


*현재는 오랜 세월의 풍상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가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울 뿐이다.

 

 

 

갓바위에서 바라본 영암 삼호읍에 설치된 공업시설.

 

 

해상보행교에서 바라본 영산강 하구둑 갑문.

 

 

영암 삼호읍의 공업시설.

 

 

목포 국립 해양문화재연구소.

 

 

입암산(笠巖山) 전경.

 

 

 

2019.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