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광주 북구.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

백산(栢山) 2019. 8. 8. 09:00

 

 

광주 북구.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 전경.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1985.02.25)

 

 

다녀온 날: 2019년 7월 28일.

 

 

광주 북구 충효샘길 7 (충효동 440)

 

 

 

기념물 제4호. 충효동 정려비각 표지석.

 

 

충효동 정려비각 안내문.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 왜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정려비각.

 

 

이 비(碑)는 정조 13년(1789)에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

 

 

전주부윤 한용구가 쓴 정조어제륜음(正祖御製綸音)

 

이 비각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 일가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비각 내에는 정조(正祖)가 김덕령 장군과 금산(錦山)에서 전사(戰死)한 그의 형 김덕홍(金德弘), 왜병(倭兵)에게 굴하지 않고 순절한 그의 처 흥양이씨(興陽李氏), 노모(老母)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했던 아우 김덕보(金德普) 등의 충(忠)·효(孝)·열(烈)을 표창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충효리로 사명(賜名)한 표리비(表里碑)가 있다.

 

 

정려비.

 

 

비의 크기는 총 높이 220cm, 비신 높이 171cm, 비신 너비 68cm이며 비갓이 얹혀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건립연대는 1792년이다.

 

 

정려비문.

 

 

비(碑)의 앞면은 "조선국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증정경부인흥양이씨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 하였고, 뒷면에는 장군일가의 충·효·열을 찬양하여 충효리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정헌대 부호조판서 서유린이 선(選)하고 전라도관찰사 서용보가 썼다고 전하여 진다.

 

 

정려비 측면.

 

 

비각(碑閣)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고, 정조의 윤음(綸音)과 표리비의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있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정려비 뒷면.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

 

 

충효리 비각 상량문.

 

 

뒷편에서 본 비각.

 

 

측면에서 본 비각.

 

 

 

*김덕령 장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에 포스팅된 '충장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1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