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돌며

목포진(木浦鎭)

백산(栢山) 2010. 1. 25. 12:11

 

목포진유적비.

 

목포진(木浦鎭)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鎭營)이며 목포영·목포대라고 불렀고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목포진에 대한 기록은 「태조실록」 태조6년(1397년)5월 임신조에 전라도에는 목포를 비롯한 4개의 진을 둔다고 하였다. 물론 이때의 기록상 목포는 현재의 목포와는 다른 지역이다. 전라우수영의 전신인 처치사(處置使)의 주둔지가 당시에는 무안현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였는데 이곳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세종14년(1432) 8월에 전라우도도만호(全羅右道都萬戶) 이각(李恪)이 목포만호가 대굴포까지 들어와 있어 불편하니 지금의 목포로 옮겨 응변에 편리하게 해달라는 상주(上奏)가 있었고, 「세종실록」에는 전라도 순찰사 정흠(鄭欽)의 계문에 본도 수영을 목포로 옮기고 목포의 병선을 황원(현재 해남군 화원리) 주량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종15년에 목포병선을 주량으로 옮기고 6년 후인 세종21년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만호진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재현남육십팔리 나주 목포지지입해 고통칭목포 수군만호일인···」, 「문헌비고」에는 「···주일천삼백육척 고칠척삼촌내유정일 지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목포진은 연산군 6년(1500)에 초축하여 1502년에 완성되었다. 「무안현읍지」(1895년간)에는 「···주이백십오보 고칠석, 여장주일백사십보, 고삼척, 기재동일리, 주이십오보, 성문동문」의 시설기록과 함께 군관 이십인, 사령팔명, 구병 수군장졸 이백칠십칠명, 팔방수포군 팔백십명이 장성·남평·무안 등의 읍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목포진지」에는 만호 1인 외에 군관 6인, 진무 7인, 사부 2명, 사령 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목포진은 고종21년(1895)에 폐진되었다.

 

목포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진성은 대략 현 만호동 일대로 추측되며 만호동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가 당시의 성돌로 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폐진 직후인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 일본영사관 또는 해관으로 임시 사용되었다. 진지 주변은 그 후 영국사관 기지로 편입되었다가 한일합병 이후에 다시 민가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만호동 1의 56번지 권오현씨 댁 앞 공터에 「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석비가 남아있다.

 

 

상세정보.
도지정문화재, 지방문화재자료 제137호.
지정일자 : 1986년 11월 8일.
소재지 : 목포시 만호동 1-56번지.

 

본문 : 목포시청 홈페이지 참조.

 

 

 

목포진 터에 성곽은 흔적이 없고 유적비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보호시설을 해두었다.

우측에 목포진유적비와 좌측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목포진 유적비와 유적비문.

 

 

유적비 안내문.

 

 

목포진지 안내판.

 

 

목포진지 안내문.

 

 

유달산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진터.

(사진 중간 부분에 바위로 된 부분이 목포진터이며 그너머 바다는 목포항이다.)

 

 

유달산 노적봉에서 바라본 목포진터.

 

 

목포진3길.

(이 길을 따라 오르면 목포중앙성결교회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오르면 목포진2길을 만나게 된다.)

 

 

목포진2길.

파란지붕의 집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0미터정도 오르면 목포진터에 이른다.

 

가는 길.
목포진을 찾아가기 위해서 초원호텔 앞쪽 언덕에 있는 중앙성결교회의 입구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교회 앞 오르막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목포 답사 1번지 목포진의 유적비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탐방: 2010년 1월 24일.

 

글, 그림 / 봉구아재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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