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북 정읍.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武城書院)

백산(栢山) 2020. 2. 10. 09: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 홍살문.



문화재 지정 사적 제166호.
(1968.12.19 지정)


201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한국에서 14번째로 지정된 1,100년의 역사를 품은 곳입니다.




다녀온 날: 2019년 11월 3일.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원촌1길 44-12)




무성서원(武城書院) 전경.


외삼문 역할을 하는 현가루(絃歌樓)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무성서원 표지판과 각종 공적비.



공적비 비림.


우측에서 두번째 비석은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 불망비'입니다.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이최응으로 도움으로 서원철폐령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가루(絃歌樓)



현가루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자문의 현가주연 접배거상(絃歌酒宴 接杯擧觴: 현악기로 노래하고 술로 잔치하고 잔을 잡고 권함)이란 문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는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무성서원(武城書院)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 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毁撤:헐어 부수어서 걷어 버림)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명륜당(明倫堂)·장수재(莊修齋)·흥학재(興學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Daum백과]



무성서원(武城書院)



무성서원 강당 안내문.



무성서원 중수기.

武城書院 重修記.



무성서원 장원 중수기.

武城書院 墻垣記.



무성서원 모현기.

武城書院 慕賢記.



내삼문.



태산사(泰山祠) 사당.



태산사(泰山祠) 편액.



태산사(泰山祠) 안내문.



태산사(泰山祠)


태인은 이미 신라 시대에 태산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도 이곳의 현령을 지냈다.

 

최치원이 합천의 군수로 전출된 뒤, 고을 사람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생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선현사(先賢祠)이고, 조선 시대인 성종 15년(1484년)에 선현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바로 태산사(泰山祠)로 무성서원의 전신이다.


광해군 7년(1615년)에 태산사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서원을 짓고, 80여 년이 지난 1696년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과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서원에는 최치원 외에도 조선시대의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배향하였다.



무성서원 향사는 매년 2월 중정일에 지내고 있다.




신용희 불망비각.



신용희 불망비 안내문.



신용희 불망비.



서호순 불망비각.



서호순 불망비 안내문.



서호순 불망비.



강수재(講修齋)



강수재(講修齋) 편액과 대청.



무성서원 강수재 중수기.



강수재 앞에 병오창의 기적비와 진사 최영대 영세불망비가 자리하고 있다.



병오창의 기적비(丙午倡義 紀蹟碑)



병오창의는 구한말 을사늑약(을사조약, 1905년)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무너져 가는 국권을 되찾기 위해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을 중심으로 800여 의사가 참여한 호남 최초의 의병활동이다.


당시 의병들은 태인과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진출했지만 일본군이 아닌 조선 진위대가 진압하러 오자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자진 해산했다. 
   
이때 붙잡힌 면암과 둔헌은 대마도로 유배됐으며 면암은 그곳에서 단식으로 순국했고, 둔헌은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본군에 잡혀 거문도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단식으로 순국했다.


1992년 무성서원에 병오창의 기적비(丙午倡義記 蹟碑)를 세워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진사 최영대 영세불망비각.



진사 최영대 영세불망비.




2019.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