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완도. 최강장군 가리포해전 대첩비

백산(栢山) 2020. 2. 26. 09:00


의숙공 최강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 전경.



최강장군(崔堈將軍) 가리포해전 대첩비(加里浦海戰 大捷碑)는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망석리(석장리) 1067-2에 세워져 있으며
2005년 1월 4일 완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었다.



다녀온 날: 2020년 2월 23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망석리 1067-2.



의숙공(義肅公) 최강장군은 전주최씨로 1559년에 태어났다. 자를 여견 호를 소계라 하였다. 158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사천, 웅천, 진주, 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패퇴로 끝났지만 전후에도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에 왜구의 침범으로 약탈과 노략질이 끊이지 않자 이를 대비코자 최강장군이 발탁되어 가리포첨절도사(완도군수)에 임명되었다.


1605년 6월 8일 왜구의 대선단이 제주근해로부터 완도 앞 바다 석장포 왜증에 침입하려 하였다. 이에 장군은 석장포에 군졸을 매복시키고 왜병을 전멸시키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다음날 수군을 인솔하여 적을 석장포 근해로 유인하여 수십 척의 화공선을 적선에 추돌시켜 소각하였고 허둥대던 왜병은 매복 중이던 우리 수군에게 소탕되었다. 간신히 석장포에서 빠져 달아난 왜선을 최강장군은 멀리 장수도까지 추격하여 소탕하는 대전과를 이루었다. 이 전공으로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녹봉되고 가선대부로 승계 순천부사로 영전하였다.


최강장군이 순천부사로 부임했을 때는 왜구의 침입은 소강상태였으나 오랜 전화로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의존하고 고을 사람들은 불구자와 과부, 그리고 노약자나 어린아이들뿐이었다. 장군이 그 참혹함을 보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내 백성이 굶주린다면 내 살과 피를 도려서라도 먹여 살릴 것이다.' 라며 관곡을 풀어 백성을 규휼하고 직접 쟁기질과 지게를 지고 일손을 도왔으며 모자라는 양식을 충당하기 위해 직접 노를 졌고 거물을 던져 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장군의 선정이 지극하였기에 유독 순천에서는 굶어 죽은 백성들이 없었다고 한다.
최강장군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가리포와 순천 백성들은 수없이 몰려와 애통 망곡해 하며 장군의 묘 앞에 초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한 후에 돌아갔다고 하니 저 목민관으로 이름난 위나라 왕조의 양일에게도 없었던 기록이다. 자식이 어버이 시묘살이도 어려운 일인데 목민관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은혜가 없었더라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전라도에서 경상도까지 먼 길을 물어, 물어 찾아와 전직 관리를 위해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며 시묘한 일은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감동적인 휴머니티로 남을 것이다.
 


- 웹사이트 -



의숙공 최강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



의숙공 최강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



최강장군 가리포해전 대첩비 안내문.



대첩비 뒷면의 최강장군에 대한 비문.



2020.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