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유적지

전남 무안.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응문 일가 현창비.

백산(栢山) 2022. 6. 29. 09:00

최근에 건립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현창비.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차뫼마을 입구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응문 일가의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 현창비.

 

 

*소재지: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265 (차모길 12)

 

 

*김응문 일대기.

 

김응문 일가는 1894년 당시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와 다산리 차뫼마을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김응문의 아버지는 광수(光綬)로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창구(昌九), 영구(永九), 학구(學九), 덕구(德九)였다. 김응문은 맏아들로 1849(헌종 15)에 태어났다. 응문은 이고, 창구가 본 이름이다. 그의 맏아들 우신(禹信)가 여정(汝正)으로 1867(고종 4)에 태어났다.

 

김창구의 동생 이름은 영구이고, 는 효문(孝文)이다. 1851(철종 2)에 태어났으며,

18941212일 처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막내 동생인 덕구는 가 자문(子文)이다.

1868(고종 5) 태어나서 김응문과 같은 날인 1894129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신(禹信)1894129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주 김씨 에서는 창구와 그의 아들 우신, 영구와 덕구 등 4명이나 이 지역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김응문은 배상옥과 친교가 두터워 일찍 동학에 입도하여 몽탄면의 접주가 되었다고 하였다.

 

김응문(金應文)은 본관이 나주(羅州)이며 몽탄면 다산리 차뫼마을 출신으로 무안 대접주 배상옥(裵相玉)과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몽탄 일대의 접주로 자기 집에서 각종 병기를 만들었으며 많은 군자금을 모아 무안 농민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었다.

 

함평 고막원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집에 돌아온 응문은 일본 헌병대의 체포령에 시달려 일시 몸을 피하고 함평군 엄다면 별뫼마을에 숨어 있다가 거기에서 체포되어 무안으로 압송되어 갑오년 128일에 처형되었는데 불로 태워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뒷날 이 마을의 김본형(金本衡)씨가 김응문의 집터를 사서 새로 성주하려고 집터를 다듬던 중에 엽전 백 냥과 화살촉· · · 탄환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웹사이트 -

 

 

무안의 나주 김씨 장손이었던 김응문은 10칸이 넘는 집에 사는 등 풍족한 양반생활을 하다 18944월 둘째 동생 효문, 막냇동생 자문과 큰아들 여정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김응문 일가는 무기 공급, 군자금 지원 등 무안 동학혁명을 주도했다. 같은 해 11월 나주 고막원 전투에 참여했다가 모두 일본군에 붙잡혔다. 128일 무안 관아에서 김응문과 자문, 여정은 참수 당했고 나흘 뒤 효문도 뒤따랐다. 가계를 잇기 위해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셋째 윤문도 이때 끌려가 고문을 받고 이듬해 11월 후유증으로 숨졌다. 드러내놓고 슬퍼할 수 없었던 유족들을 김응문과 자문의 머리 유골만 수습해 무안읍의 월구정이라는 산에 아기 묘를 몰래 만들어 안장했다. 또 효문은 무안 몽탄면 사천리, 여정은 무안읍에 묘를 만들었다.

 

후손들은 1996년 김응문과 부인 노씨를 합장하려 월구정 아기 묘를 파묘했다. 이 과정에서 옹기 항아리 안에 든 머리 유골을 발견했으나 다시 매장했다. 당시 매장문화재법은 유골이나 미라 등을 문화재에 포함하지 않은 터라, 발견된 육골도 연구는 커녕 화장이나 매장을 해야 했다.

 

후손들은 2019년 동학혁명 국가기념일이 제정되자 김응문의 추모사업을 추진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김응문 일가의 합동묘역 조성을 위해 올해 428일 개장하는 과정에서 김응문 유골의 존재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 개장에 참여했던 박석면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응문, 효문, 여정 등 세분의 묘를 먼저 개장했는데 모두 머리 유골만 확인됐다. 참수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과 영상을 전달받은 동학기념재단은 유골 상태와 기록 등을 근거로 유골들이 김응문 일가의 것이 맞다고 잠정 결론 내렸다.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진도 동학군 유골이 발견돼 이듬해 봉환된 적은 있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동학군 유골이 확인된 적은 없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 현창비.

 

 

현창비 뒤편.

 

 

조그마한 독 하나를 세우며...

 

 

조그마한 독 하나를 세우며...

 

 

 

현창비 건립 추진 위원회 명단.

 

 

현창비 옆에 차뫼마을 이정표석이 세워져 있다.

 

 

차뫼마을로 들어서면 김응문 집터를 만날 수 있다.

 

 

김응문 집터 입구.

 

 

주소가 차뫼길 12로 되어있으며 실제 거주자는 한이순으로 되어있다.

 

 

때마침 주인이 계서서 양해를 구하고 집안을 촬영할 수가 있었다.

 

 

본채 모습.

 

 

본채 앞에 텃밭.

 

 

 

 

과거에 무기를 제작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헛간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본채 뒤 밭으로 가는 길목에 커다란 거석들이 즐비한데 혹시 고인돌이 아닌가 싶다.

 

 

거석.

 

 

거석.

 

 

거석.

 

 

거석.

 

 

본채 뒤 넓다란 밭.

 

 

차뫼마을 경로당.

 

 

동학혁명투사 현창비.

 

본시 현창비가 자리하고 있던 곳.

 

 

현창비 뒷편.

 

 

도로변에 나주김씨 세장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나주김씨 사적지 표지석.

 

 

나주김씨 안내문 표지석.

 

 

 

*다녀온 날: 2022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