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유적지

전북 고창.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손화중 도소터 & 피체지

백산(栢山) 2022. 12. 7. 06:00

손화중 도소터(孫和仲 都所址)

 

*도소(都所): 동학 도접주들의 총집회 기관.

 

 

 

*주소 : 전북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 터.

 

 

정읍에서 태어난 손화중(孫和仲:1861~1895)은 부안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정읍을 거쳐 무장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본래 농민들에게 악명이 높았던 최부자 집이 있었던 곳이다. 이때 동학 농민 혁명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면서 많은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었던 괴치리로 도소를 옮겼다고 한다.

 

손화중 대접주는 무장·정읍·고창·부안은 물론 광주· 나주· 장성· 담양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였고, 그 대상도 다양하였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한 사료적 근거로는 오지영의 동학사주한일본공사관기록등이 있다.

 

현재 이곳에 손화중 도소가 설치되었다는 어떤 흔적도 없지만 거주자인 정동환의 구술에 따르면 이곳이 도소였다고 한다. 정동환은 어려서 당숙으로부터 이곳이 교당으로 쓰였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으며, 원래 본채 외에 사랑채가 자의 형태로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랑채에서 사람들의 모임이 잦았다고 한다.

 

현재 빈 터이며 손화중 도소가 설치되었다는 어떤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다. 최부자가 살았던 집에 현재는 정동환이 살고 있다. 정동환의 집 문 쪽에 도소가 있었으며, 손화중을 체포한 후 이곳 도소에서 조사, 심문을 한 후 서울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현재 손화중 도소 터는 농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손화중 도소는 손화중과 관련된 인물 유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전 손화중 포의 세력이 괴치리에서 형성되었고 이 세력을 바탕으로 전봉준과 동학 농민 혁명을 이끌 수 있었다. 곧 이곳의 물적·인적 자원이 곧 동학 농민 혁명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 유적 이전에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고창 지역 농민군의 세력 분포와 관련하여 동학 교단의 근거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 웹사이트 / 이용찬 -

 

 

도로에서 도소 터로 들어가는 길목.

 

도소 터 입구에 괴치2길 이정표와 비닐하우스가 자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손화중 도소(都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도소 터는 채소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소 터.

 

도소 터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길.

 

도소 터 표지판 옆의 대추나무에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아래는 손화중(孫和仲) 지도자가 피체되었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손화중(孫和仲) 지도자 피체지(被逮地)

 

*은거하던 재실의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던 장소.

 

 

 

*주소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로 322-65.

 

 

 

손화중(孫和仲)은 고창 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손화중 피체지는 동학농민혁명이 지역 봉기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된 무장 기포의 주역 손화중이 체포된 곳이다.

 

손화중은 조선 후기 봉건 정부의 모순에 따른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전봉준과 함께 고부 봉기를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의 근간을 이루던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승리로 기록된 전주성을 점령한 주역들이었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 설치 기간 신분제 개혁과 토지 개혁을 실천하고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895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은 스스로 이봉우에게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는 권유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재실 주변은 낮은 야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재실을 관리하는 작은 농가 주택이 있다.

 

손화중은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큰 가장 동학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지역적 민란에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한 고창 지역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가이다. 손화중 피체지는 관군에 의해 손화중이 체포된 현장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곳에서 체포된 그는 관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 웹사이트 -

 

동학농민 혁명지도자 손화중 피체지 안내판이 퇴색한 채로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시골 농가로 관리사인지 모르겠으나 인적은 없었다.

 

손화중 지도자가 피체되었던 곳.

 

당호는 침명재(枕溟齋)라고 되어 있다.

 

남대희가 썼다.

 

 

침명재 우측 부분.

 

침명재 측면.

 

침명재 뒤편.

 

피체지에서 바라본 농로길.

 

(도로에서 드넓은 들판의 농로길을 따라서 피체지로 들어왔다)

 

피체지 뒤편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미당 시문학관으로 갈 수 있다 하여

이 길을 택했다가 길이 좋지않아 무척 애를 먹었다.

 

 

 

*다녀온 날: 2022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