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안김씨 효열문.
(扶安金氏. 孝烈門)
*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10-16
부안김씨 효열문(扶安金氏孝烈門)은 개항기에 부안김씨(扶安金氏) 김채상(金彩相)[1794~1868]과 김채상의 처 해주최씨(海州崔氏), 김우상(金佑相)[1794~1834]의 처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김채상과 김우상은 한성부 소윤(少尹)을 지낸 김세영(金世英)의 후손이다.
김채상과 김우상은 아버지 김준기(金俊起)[1758~1815]와 어머니 함양조씨(咸陽曺氏)[1759~1843] 사이에서 5형제 중 둘째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채상 형제는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아버지를 일찍 여의자 편모를 효도로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이 병은 오도조(五桃鳥)란 새를 구해 약으로 써야 나을 수 있다 하였다.
형제는 오도조라는 새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서 도저히 구할 길이 없어 자신의 목숨을 대신하겠다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어느 날 저녁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너의 어머니 약은 변산 입암(立岩) 아래에 있다”라고 하였다.
형제가 놀라 깨어 가서 보니 정말로 그런 새가 있어서 그것을 끓여 기름으로 약을 제조하여 어머니가 마시게 하였다. 그러자 바로 효험이 있었으니 정성스러운 효행에 감동한 하늘이 내려 준 상서로운 일이었다고 하였다.
형제와 부인들이 부모를 정성으로 공경하며 자식의 도리를 지켰고, 부부지간에도 서로 존중하고 예를 다하여 진정한 부부애를 지켜 나아감으로써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김우상의 妻 해주최씨는 시부모를 지극한 孝로 섬겼으며 남편을 사랑으로 받들었다. 남편이 모진 병에 시달렸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치료하니 주위 사람들이 孝烈婦라 일컬었다.
이들의 효열이 조정에 통보되어 나라에서 1886년(고종 23)에 효열, 효자의 정려를 내렸다.
부안김씨 집안의 묘는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에 있다.
1886년에 정려를 받아 건립하였고, 1908년(순종 2)에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효열문 담장은 붉은 벽돌로 둘렀으며 중앙에 철제문을 달았다.
정려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길이는 정면이 각 222㎝, 측면이 210㎝이다.
시멘트 기단 위에 다듬은 기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나무 기둥을 얹었다.
활주는 없다. 가운데에 출입문을 달았으며 바닥은 마루로 마감하였다.
정면에는 ‘효열문(孝烈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효자학생부령김채상지려(孝子學生扶寧金彩相之閭)’, ‘효열효자김채상지처(孝烈孝子金彩相之妻)’, ‘유인해주최씨지려(儒人海州崔氏之閭)’라고 쓴 현판이 있다.
부안김씨 효열문은 부안김씨 문중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 디지털부안문화대전 -

효열문.
2개의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효열문(孝烈門)

효열문(孝烈門) 현판.

열녀 학생 김우상지처
(烈女 學生 金佑相之妻)
유인 밀양박씨 지려.
(孺人 密陽朴氏之閭)

효열 효자 김채상지처
(孝烈 孝子 金彩相之妻)
유인 해주최씨지려
(儒人 海州崔氏之閭)

효자 학생 부령김채상지려
(孝子 學生 扶寧金彩相之閭)

융희 2년 2월 8일 건립.
서기 1908년.

증손 종술이 쓴 공적현판인 듯하다.






부안김씨 효열문 안내판이나 퇴색하여 알아 볼 수가 없다.

부안김씨 효열문.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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