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나씨 5

전남 나주. 소충사(召忠祠). 전남 기념물 제26호.

소충사(召忠祠) 금성나씨. 체암 나대용 장군 사우. 전라남도 기념물 제26호. *주소: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산 35-2. 소충사(召忠祠)는 해상 전투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 나대용(羅大用)의 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1556∼1612) 장군은 선조 16년(1583) 무과에 합격한 후 군함 연구에 관심을 갖고 10여 년 간 거북선을 연구 제작 실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을 협의하고 3척을 처음 진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새로운 전함인 창선과 ..

문화재 탐방 2023.09.01

전남 나주. 금성나씨. 체암 나대용 장군 생가. 전남 기념물 제26호.

체암 나대용 장군 생가. 금성나씨 가옥. 전라남도 기념물 제26호. *주소: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륜길 28-5.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장군인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1556∼1612)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곳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합격한 후 군함 연구에 관심을 갖고 10여년간 거북선을 연구 제작 실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을 협의하고 3척을 처음 진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새로운 전함인 창선과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였다. 1611년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임명되었으나 전쟁 때 입은 상처가 도져서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문화재 탐방 2023.08.28

전남 나주. 금성나씨. 봉강사(鳳岡祠). 전남 문화재자료 제94호.

봉강사(鳳岡祠) 금성나씨 사우 (錦城羅氏 祠宇)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1984.02.29)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553-2번지. 봉강사(鳳岡祠)는 고려 때 문신인 나문규(1312∼1355)와 나계종(1339∼1415)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금성나씨 문중에서 세운 사당이다. 나문규는 고려 충혜왕 1년(1334) 문과에 급제하고 명경박사를 거쳐 공민왕 1년(1352) 서해안 염사를 지냈으며, 나계종은 공양왕 2년(1390) 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정몽주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초가집을 지어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를 죽헌(竹軒)이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4년 복원하였다. 앞면 ..

문화재 탐방 2023.08.25

전남 나주. 금성나씨. 경모사(景慕祠)

경모사(景慕祠) 금성나씨 사우 (錦城羅氏 祠宇) *소재지: 전남 나주시 문평면 대도대장길 21-5. 금성나씨 가문유래(錦城羅氏 家門由來)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錦城羅氏)는 기원전 759년(주나라 무왕 때)에 광정공(匡正公)이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나라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가 되였다. 금성나씨(錦城羅氏) 대동보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였다. 당(唐) 태종(太宗)때 상서좌북야(尙書左僕射) 나지강공(羅至强公)이 조정의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우리나라(발라형=나주)에 망명한 후 신라국 좌승상 (左丞相)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 十餘代가 대대로 나..

발길을 따라 2023.08.21

전남 나주. 봉강사(鳳岡祠) 금성나씨 사우.

봉강사(鳳岡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1984.02.29)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553-2번지. 봉강사(鳳岡祠)는 고려 때 문신인 나문규(1312∼1355)와 나계종(1339∼1415)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금성나씨 문중에서 세운 사당이다. 나문규는 고려 충혜왕 1년(1334) 문과에 급제하고 명경박사를 거쳐 공민왕 1년(1352) 서해안 염사를 지냈으며, 나계종은 공양왕 2년(1390) 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정몽주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초가집을 지어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자신의 호를 죽헌(竹軒)이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4년 복원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

발길을 따라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