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7

전남 무안. 금남 최부선생 묘역과 경모재.

금남 최부 선생 묘역과 경모재 전경.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 *주소: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산125 (호반로 741-2) 금남 최부(1454~1504) 선생은 본관은 탐진이고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가 금남(錦南)이다. 최부는 아버지 최택(崔澤)과 어머니 여양 진씨(陳氏) 사이에서 단종2년인 1454년에 태어났다. 조선 시대의 문신이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는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저장성 닝보부에 표류했다가 반년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을 썼다. 그는 수차(水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와 후일 충청지방의 가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표해록..

발길을 따라 2023.06.12

전남 순천. 전남 문화재자료 제4호. 옥천서원(玉川書院)

옥천서원(玉川書院) 전남 문화재자료 제4호. (1984년 지정) *주소: 전남 순천시 옥천동 165 (임청대길 18) 옥천서원(玉川書院)은 1498년(연산군 4)에 창건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4년 다시 지었다. 이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복원하였다. 배향 인물은 김굉필(金宏弼)이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은 시호가 문경(文敬)이며, 김종직의 제자였다.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갑자사화로 사형되었다. 1564년(명종 19)에 순천부사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사(精舍)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8년(선조 1)에 ‘옥천(玉川)’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597..

문화재 탐방 2023.03.01

전남 화순. 해망서원(海望書院) 전남 문화재자료 제122호.

해망서원(海望書院)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1984.02.29)  전남 화순군 춘양면 섶메길 37-1 (대신리)  해망서원(海望書院)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1984.02.29)로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정여해를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글을 썼는데 그 중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세조를 중국의 고사를 이용하여 비난한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의 단서가 되었다.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들을 통해 절의를 중요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맥으로 이어졌다. 김굉필(1454∼1504)·정여창(1450∼1504)·김일손(1464∼1498)은 정여해와 같은 김종직의 제자들이지만 연산군 4년..

문화재 탐방 2017.06.26

전남 화순. 죽수서원(竹樹書院)

죽수서원 표지석과 홍살문.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 (모산리) 정암 조광조(1482∼1519)와 학포 양팽손(1488∼154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광조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고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였으며 위훈삭제사건으로 반정공신들의 반발을 사서 죽음을 당했다. 조광조는 선조 1년(1568)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양팽손은 조선 중기 문신이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었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죽수서원은 선조 3년(1570) 조광..

문화재 탐방 2016.03.12

전남 화순. 영벽정(映碧亭)

영벽정(映碧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산1번지. 영벽정을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양팽손(1488∼1545)과 김종직(1431∼1492)의 시로 미루어 조선 전기 관청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0년(1632)에 능주목사 정연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고쳐지었다고 전하며, 고종 9년(1872)에 불타 버린 것을 고종 10년(1873)에 새로 고쳐지었다. 이후에도 보수를 거듭해 오다가 1920년에는 주민들이 모은 비용으로 손질하여 고쳐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는데 3겹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둥근기둥(두리기둥)을 세워 마루를 깔았고 마루의 사방에는 조각한 난간을 ..

문화재 탐방 2016.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