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유적

전남 여수. 고소대(대첩비, 타루비, 동령소갈비)

백산(栢山) 2014. 9. 25. 12:22

 

좌수영다리.

(진남관 쪽에서 본 좌수영 다리)

 

전남 여수시 고소3길 13.

 

진남관을 거쳐 고소대로 향하는 길목에 좌수영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매영정과 벽화거리, 그리고 고소대에 이른다. 거리로는 약 300여미터정도라 할까.

 

 

좌수영다리

(진남관에서 좌우영다리를 지나 고소동 방면에서 바라본 좌수영다리와 진남관)

 

 

매영정(梅營亭)

좌수영 다리를 지나면 만나는 정자.

 

조선왕조시절 여수를 전라좌도수군영, 전라좌수영, 매영이라 불렸다.
그동안 진남관에서 고소대로 가는 길목에 끊어졌던 다리(좌수영다리)를 다시 복원하며 오고가는 길손들이 옛 일을 되새겨보며 쉬어가도록 만들어진 쉼터의 정자이다.

 

 

고소 천사 벽화골목 안내도.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를 보전했을까?


 

고소대 가는 길목의 벽화들.

 


이순신 장군이 소싯적에 병정놀이 하던 모습의 벽화.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당시 낙마하던 모습의 벽화.

 

 

임진왜란 당시 장병들의 훈련모습의 벽화.

 

 

고소대(姑蘇臺)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비각 전경.

 

 

비각.

 

 

비각 앞에 세워진 좌수영대첩비 설명 표지석.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보물 제571호)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의 부하였던 유형이 돌을 마련하고, 비문은 이항복이 지었으며 김현성이 새겼다. 비석(碑石)은 비(碑)의 기단, 거북모양부분인 귀부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가 잘 남아 있다. 거북이의 발은 길게 뻗어 나와 있으며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고, 머릿돌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두 마리 용(龍)이 구름과 함께 엉켜 있다. 비(碑) 윗부분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쓰여 있다.
 
비문(碑文)에 '만력 43년 5월에 세우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碑)가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여수경찰서장이 이 대첩비를 서울로 옮겼으나, 해방 후 그 행적을 알지 못하다가 경복궁 근정전 뜰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타루비(墮淚碑: 보물 제1288호)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순신 장군 막하에 있던 군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장군을 생각하면서 비석(碑石)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古事)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문(碑文)은 '타루비(墮淚碑)'라는 비(碑)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碑)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다.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


좌수영대첩비(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비석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 비석을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비석으로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戌寅精日立)"이란 명문이 있어 숙종 24년(1698)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이 약 30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

 

 

보호수 느티나무 안내판.

 

 

탐방: 2014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