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충렬사(南海 忠烈祠)
사적: 제233호.
지정일: 1973.06.11.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남해를 두 번 째 들린다. 첫번째는 지난 9월 28일에 들렸으나 안타깝게도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셔터 한번 누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가 카메라를 새로 구입하여 머나먼 거리인 남해를 다시 찾은 것이다.
그동안 내 블로그에 <성웅 이순신>이라는 카테고리에 소제목 '이순신의 흔적'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이충무공의 유적, 유물, 사당 등을 찾아 카메라에 담아 왔는데, 이제 남해 충렬사로 일단락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음 기회에 여건이 허락한다면 경상도 거제와 통영. 그리고 아산 현충사와 서울 명보극장 옆 이순신 생가 터를 담아 볼 예정이다.
그럼 여기서 남해 충렬사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본다.
남해 충렬사(南海 忠烈祠)는 조선시대의 사당으로서 충무공 이순신이 1598년 11월 관음포(觀音浦)에서 전사(戰死)한 뒤 1599년 2월 전남 완도 고금도를 거쳐 충남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運柩)되어 안장(安葬)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시신(屍身)을 안치(安置)했던 곳이다.
인조 10년(1632)부터 유림(儒林)들이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고 효종 9년(1658)에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비(碑)도 다시 세웠다. 현종 3년(1662)에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사당, 재실, 비각,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으며 충무공의 시신(屍身)을 묻었던 자리에 가묘(假墓)가 남아 있다.
"충무공을 기린 승장(僧將)"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운 '옥형'과 '자운'이라는 승장(僧將)이 있었다.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는 배에 올라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충무공이 전사(戰死)하자 '자운'은 쌀 6백 석을 노량으로 싣고 와서 공(公)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옥형'은 여수 충민사 곁에 초당(草堂)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바다에서 사고가 있을 때면 꿈에서 꼭 충무공을 보았다고 한다.
이충무공비.
외삼문 밖 오른쪽에는 한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노라' 라고 쓰여 있다.
1948년 정인보가 쓴 것을 경남도청에서 세운 <충렬사비(忠烈祠碑)>이다.
청해루(충렬사를 관리하는 관리사의 숙소로 쓰인다)
충렬사 내삼문.
(충렬사 내삼문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이충무공묘비각
(李忠武公墓碑閣)
1660년에 세워진 이 비각의 비문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 贈諡忠武李公廟碑 建立(충렬사에 크게 빛나는 조선국 삼도수군 통제사 시호는 충무인 이공의 사당 비석을 세움)'이라고 적혀 있는데,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짓고,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다고 되어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순신장군의 전공과 나라와 백성에게 끼친 덕을 칭송한 글이다.
보천욕일(補天浴日)
이 현판은 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보천욕일'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연합작전을 지휘했던 명나라 장수 진린이 전쟁이 끝난 후 선조임금에게 올린 글 가운데 "이순신은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의 공이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구멍난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켰다."라는 뜻이다. 즉,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은 큰 공덕을 의미한다.
남해 충렬사비(南海 忠烈祠碑)
충민공비(忠愍公碑)
충민공비(忠愍公碑) 표석.
사당인 충렬사 좌우에는 충무공비(忠武公碑)와 충민공비(忠愍公碑)가 서있다.
충무공비는 알겠는데, 충민공비는 누구의 비(碑)일까? 궁금하다.
그러나, 충민공비(忠愍公碑) 앞에 있는 표석이 설명해주고 있다.
충무공이 195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35년 뒤인 1633년 지역민 김여빈, 고승후가 초옥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자, 현령 이정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뒤 1658년 조정에서 새로 사당을 지으면서 충민공비를 매몰하고, 이충무공비를 세웠단다.
그런데 1973년 충렬사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정비사업을 하던 중 매몰되었던 충민공비가 발굴되어 다시 세운 것이 이 비석이라는 것이다.
충무공비(忠武公碑)
충렬사 사우.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사우인 본당으로 현재의 사우는 1922년에 신축한 3간 사우이다.
이충무공 위패함과 영정.
사당 내부의 정면에는 위패함이 봉안되어 있고, 그 위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張遇聖) 화백이 1953년에 그린 충무공의 초상화인데 영의정의 관복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정부에서 이 영정을 1973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원도(原圖)는 현충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이것은 원도의 모사품(模寫品)이다.
이충무공 영정과 노량해전 당시의 상상도.
팔사품(영패, 귀도, 참도, 도독인,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사우 안쪽을 들여다보면 왼쪽 벽에 명조 팔사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팔사품은 명의 수군도독 진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 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8가지 품목 15점이다. 도독인 1개와 영패 1쌍, 귀도 1쌍, 참도 1쌍, 독전기 1쌍, 홍소령기 1쌍, 곡나팔 1쌍, 남소령기 1쌍이다.
도독인은 사실상 이순신 장군을 명나라 도독에 봉한다는 징표이며, 이는 명나라 품계로 정1품 벼슬에 해당한다.
이충무공 가묘(李忠武公 假墓)
사우 뒤편에는 가묘(假墓)가 있는데, 담장으로 둘러 쌓여 있고 사우에서 가묘로 가는 문을 내어 통행하게 했다.
이곳이 장군의 유해를 처음으로 안치했던 장소로서 흔히 초빈했다고 하는데, 초빈은 집 바깥의 초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뜻이다. 집안에 빈소를 차리는 것을 가빈이라 한다.
이충무공 가묘 안내문.
이충무공 가묘.
오른쪽에 우뚝 솟은 나무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식수한 것이란다.
충렬사 안내판.
남해대교.
충렬사 입구에서 바라본 남해대교.
거북선.
충렬사 앞 바다에 거북선이 떠있는데 이 거북선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형태로 전시되고 있어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선장방.
거북선 안에 들어서자 맨 처음 눈에 띈게 선장방이다.
각종 신호 연(鳶).
선장 방 옆에는 각종 연들이 걸려있는데 이 연으로 아군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했다.
장전된 대포들.
장령방.
각종 훈령기.
거북선 제원표.
교지(이순신 장군이 순국 후에 받은 충무공(영의정) 교지)
교지(보인 이순신 무과 병과 제4인급제 출신자 만력 4년 ?월 일)
각종 대포.
각종 화살.
신기전?
탐방: 2014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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