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과 김덕령 장군.
무등산 관광도로를 따라가다 원효사를 가기 전 배재에 이르면 왼편에 잘 가꾸어진 묘소와 함께 충장사가 바라보인다. 이곳이 무등산이 낳은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장군을 모신 사우(祠宇)이다.
무등산을 말할 때 김덕령 장군을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만큼 무등산의 돌 하나, 봉우리 하나에도 그의 전설이 담겨있다. 특히 이 같은 전설을 얘기할 때에는 산을 오르는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아녀자, 그리고 소풍 나온 아이들까지도 무례하게 '덕령이' 혹은 '덩령이'라 부른다. 그만큼 김덕령 장군은 광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영웅이요, 영원한 벗인 것이다.
장군은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1567년 광산 김씨 붕변(鵬變)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수(景樹),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같은 무예를 익히고, 글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18세 때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63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 명령을 받고 의병을 일으켜 제봉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에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사호(賜號)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병이 위독하여 형 덕홍(德弘)과 함께 고경명 장군의 권유로 어머님을 보살피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사이 금산전투에서 형이 제봉 고경명과 함께 전사했다는 비보를 받고 통분을 참지 못했다.
이듬해 8월 모친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른 뒤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과 인근 고을에 격문을 띄워 장정 5천의 의병을 모았다. 그 해 12월 조정으로부터 충용장의 군호(軍號)를 받고 담양에서 출전하여 순창, 남원, 운봉, 함양을 거쳐 진해, 고성지방을 방어했고, 왜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았으며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물리쳤다.
1595년에는 고성을 침략하려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도체찰사 윤근수의 종을 죽인 일로 한때 의금부에 수감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 장군은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회군했다. 그런데 충청도 순찰사의 종사관인 신경행의 무고로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악형 끝에 억울하게 옥사하니 이때 공의 나이 29세였다.
이듬해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왜적이 전라도까지 휩쓸게 되었는데 부인 이씨(興陽 李氏)도 담양 추월산에 피난 중 왜적이 쳐들어오자 이를 꾸짖고 순절했다.
1661년(현종 2년)에야 공의 억울함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이 복직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종, 이어 영조 때 의열사(義烈祠)에 제향, 1788년(정조 12년)에 다시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고운석의 삶의 이야기]
- 출처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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