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를 돌며

목포진 역사공원(木浦鎭 歷史公園)

백산(栢山) 2015. 12. 16. 09:00

 

목포진 역사공원(木浦鎭 歷史公園) 전경.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전남 목포시 목포진길11번길 9-9.

 

 

 

목포진이 역사공원으로 2015년 1월에 총 사업비 73억 원을 들여 객사를 복원하고 내삼문, 홍살문, 전통 담장 등을 설치하고 새롭게 태어났다.

 

 

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른다. 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을 황원(현재 해남)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원래 위치는 대략 현재의 목포시 만호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

 

만호진의 성은 일본 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으며, 만호동 공터에는 목포진 유적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鎭營)이며 목포영·목포대라고 불렀고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목포진에 대한 기록은 『태조실록』 태조 6년(1397) 5월 임신조에 전라도에는 목포를 비롯한 4개의 진을 둔다고 하였다. 물론 이 때의 기록상 목포는 현재의 목포와는 다른 지역이다. 전라우수영의 전신인 처치사(處置使)의 주둔지가 당시에는 무안현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였는데 이곳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세종 14년(1432) 8월에 전라우도도만호(全羅右道都萬戶) 이각(李恪)이 목포만호가 대굴포까지 들어와 있어 불편하니 지금의 목포로 옮겨 응변에 편리하게 해달라는 상주(上奏)가 있었고,『세종실록』에는 전라도순찰사 정흠(鄭欽)의 계문에 본도 수영을 목포로 옮기고 목포의 병선을 황원(현재 해남군 화원리) 주량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종 15년에 목포 병선을 주량으로 옮기고 6년 후인 세종 21년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만호진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재현남육십팔리 나주 목포지지입해 고통칭목포 수군만호일인…」, 『문헌비고』에는 「…주일천삼백육척 고칠척삼촌 내유정일 지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목포진은 연산군 6년(1500)에 초축하여 1502년에 완성되었다. 『무안현읍지』(1895년간)에는 「…주이백십오보 고칠척, 여장주일백사십보, 고삼척, 지재동일리, 주이십오보, 성문 동문」의 시설기록과 함께 군관 이십인, 사령팔명, 군병 수군장졸 이백칠십칠명, 팔방수포군 팔백십명이 장성·남평·무안 등의 읍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목포진지』에는 만호 1인외에 군관 6인, 진무 7인, 사부 2명, 사령 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목포진은 고종 21년(1895)에 폐진되었다.

 

목포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진성은 대략 현재 만호동 일대로 추측되며 만호동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가 당시의 성돌로 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폐진 직후인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 있어 무안감리서, 일본영사관 또는 해관으로 임시 사용되었다. 진지 주변은 그 후 영국영사관기지로 편입되었다가 한일합병 이후에 다시 민가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만호동 1의 56번지 권오현씨 댁 앞 공터에 「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란 석비가 남아 있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목포진유적 비석.

 

목포진유허비는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주변 환경만 바뀌며 공원화되었다.

 

 

목포진유적(木浦鎭遺跡) 비석.

 

 

목포진지 안내문.

 

 

목포진 안내도.

 

 

목포진 객사 내삼문.

 

내삼문을 들어서면 2014년 5월에 복원된 목포진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2014년 5월에 복원된 목포진 객사.

 

목포진 객사 현판명은 '목포의 객사'라는 뜻의 '목포지관(木浦之館)'으로 문화재 전문위원인 목포대 김지민 교수가 명명했으며 현판의 글씨는 유천(儒泉) 서종견 선생이 썼다고 한다.


 

 

목포지관 현판.

 

 

목포진 객사 전(殿)

 

중앙에 놓인 걸상에 전(殿)이란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목포진 복원 상량보.

 

'서기 2014년 5월 30일 오시 입주상량' 이라고 씌여져 있다.

 

 

목포진 객사 단청.

 

 

목포 수군 만호 선정비.

 

 

목포 수군 만호 선정비 안내문.

 

목포 수군 만호 선정비는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에 의해 원래의 자리에서 파헤쳐서 다른 곳에 묻혔던 것을 해방 이후 발견하여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목포진 역사공원 주위 배경.

 

 

정자(쉼터)와 전망대.

 

 

정자(쉼터).

 

 

목포진 전망대에 세워진 목포진 역사공원 주변 관광 안내도.

 

 

 목포진 객사 뒤의 전망대에는 늘푸른 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에서 본 삼학도.

 

 

전망대에서 본 목포시가지.

 

 

전망대에서 본 목포진 객사.

 

우측으로 보이는 산등성이 가운데로 움푹 들어간 아리랑 고개가 보인다.

 

 

 

탐방: 2015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