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과 설화

해랑당(海娘堂)의 전설

백산(栢山) 2016. 1. 22. 09:30

 

 

 

해랑당(海娘堂)의 전설.

 

아주 먼 옛날, 강원도 동해바닷가 안인진이라고 하는 어촌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과년하도록 출가를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과년한 딸이 출가를 못한 것은 인물이 못나서도 아니고 마음씨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그 까닭인즉, 처녀가 남자를 보는 눈이 하늘처럼 높아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이웃집 할멈이 중매의 말을 끄집어냈다. 말하는 총각은 건너 마을 사는 대장간 집 맏아들 곰쇠였다. 과년한 처녀 해랑(海娘)은 곰쇠를 익히 알고 있었다.  오종종하고 얼굴이 검은, 보잘 것 없는 곰쇠라, 해랑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해랑은 하나같이 중매가 들어오는 총각이 못난 녀석들만인 것에 짜증을 내다 바닷가로 나갔다. 바닷가에는 해당화가 곱게 피어 있고, 그 해당화는 해랑에게, {너의 낭군은 내 모습같이 어엿한 분이다.}라고 속삭여 주는 듯했다.

  

해랑의 발걸음은 동구 밖 선창가에 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해랑의 아버지가 목수와 같이 고깃배를 고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영감님, 이만하면 튼튼하게 잘 고쳤죠?}

 

 {허허……아주 잘 고쳤네 그려, 자네 솜씨가 보통이 아니래두, 어디서 그렇게 배 고치는 솜씨를 익혔나?}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떠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이라곤 배 고치는 일 밖엔 없습니다. 어디 솜씨라고 할만한 것이야 있습니까?}

 

 {헛허……겸손하기는, 젊은 사람이 배 고치는 솜씨만 대단한 게 아니라, 마음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겸손하군.}

 

 {부끄럽습니다. 너무 칭찬하지 마십시오.}

 

 {에끼 사람도, 장가는 갔는가?}

 

 {웬걸입쇼, 누가 떠도는 신세를 보고 딸을 맡기려고 합니까?}

 

 {어디 마땅한 자리가 있으면 장가를 갈 생각은 있나?}

 

 {있구 말굽쇼, 따님이라도 있으면 사위를 삼아 주신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허허 조급하기는……두고 봄세…….}

 

 해랑은 좀 떨어져 숨어서 아버지와 젊은 목수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 공연히 가슴이 참새 가슴처럼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젊은이의 늠름한 모습은 해랑의 가슴을 휘어 잡고도 남았다. 더구나 쾌활한 웃음소리, 봉의 눈하며, 죽 뻗어 곱게 내려앉은 콧날이 해랑을 매혹시켰다.

  

<왜 아버지는 저런 신랑감을 옆에다 놔두고 무지렁이들만 들추어냈는지 몰라>

  

해랑은 가늘게 한숨을 쉬고 청년 목수를 다시 훔쳐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훌륭한 낭군감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판이 만경창파를 상상케 하여 주었다.

<저런 가슴에 꼭 안겨 마음껏 머리를 비벼대 봤으면……>

  

눈이 높다던 처녀. 이성을 그리면서도 마음에 차는 남자가 없어서 혼기를 놓쳤던 처녀가, 비로소 마음에 드는 총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해랑은 주체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총각 목수에게서 느꼈다.

  

그 날부터 해랑은 변해 갔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올랐고 몸치장은 유난스레 화려해져 갔다.

 {저 애가 갑작스레 웬 일인지 모르겠어요. 며칠 전 매파가 다녀간 이후부터는 애가 전연 달라졌으니, 곰쇠 녀석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어요. 아마 저 애가 곰쇠 녀석이 마음에 있어서, 그리도 딴 녀석들은 싫다고 했나 봐요.}

 

 {나도 그런 줄을 모르고 이상스럽다고만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아무래도 모를 일이야, 천생 연분은 따로 있는 모양이지. 곰쇠 녀석에게 정분을 두다니……}

 

해랑의 부모는 해랑이 변한 것이 곰쇠 녀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왕 그애도 좋아하는 눈치이니 빨리 서둘러 성혼을 시키는 것이 좋찮겠어요?}

 

 {그러지, 내 속으로는 요새 배를 고치는 목수가 쓸 만 해서 더 두고, 사람도 더 알아 볼겸, 해랑의 의중도 떠 볼겸, 일이 끝나는 대로 붙잡고 있는 중인데, 그러면 그 사람은 내일로 보내고 곰쇠 녀석과 빨리 일을 치루어야겠구먼.}

  

부모들은 해랑을 곰쇠와 성혼시키기로 작정하고 부엌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는 해랑을 불러 말을 물었다.

 {이애야 이리 좀 오너라.}

 

해랑은 발그레 웃음을 띄우면서 손끝에 묻은 물을 닦고 있다.

 

 {네 마음도 대충 짐작하겠으니, 곧 혼례를 치루도록 하자. 사람은 고르면 한이 없느니라. 마음씨 곱고 부지런하고 손재주 있으니 더 아니 좋으냐?}

 

 {………….}

  

해랑은 며칠 전 낮에 선창에서 들은 말이 있는지라, 총각 목수와의 혼담인 줄로만 알고는 돌아서면서,

 {아이 난 몰라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버지.} 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오냐! 그럼 내일이라도 서둘러 택일을 해야겠구나.}

부모와 딸의 생각은 각각이었지만, 어쩌다 그 마음이 한 마음인 듯 잘못 착각되었다.

  

해랑은 공연스레 웃음을 터뜨리며 콧소리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에끼 자식도, 그렇게 좋은 걸 왜 진작 말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기만 했누…….}

 

해랑의 어머니는 남의 속도 모르고 혼자 혀를 찼다.

 {예그그……남이 보면 흉볼라. 꼭 실성한 사람 같구나. 쯔쯔쯔…….}

 

해랑이 좋아서 흥흥거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의 부모들도 덩달아 가슴이 뿌듯해졌다.

  

오래간만에 해랑의 집엔 웃음꽃이 함박 피었다. 해랑은 제 방에 들어가 혼수로 장만해 놓은 버선이랑 치마며 저고리를 고리에서 꺼내 놓고 만지작거렸다. 긴 밤도 어느 듯 동이 터 왔다. 해랑은 밤잠을 한잠도 자지 않았지만, 조금도 피로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 날로 총각 목수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혼담이 총각 목수가 아닌 곰쇠인 것을 눈치 챈 해랑은 실성하고야 말았다. 해랑은 날마다 선창가에 나가 총각 목수가 일하던 자리에서 배회하며 아무나 잡고 추태를 부리기가 예사였다.

 

 {어디 갔다 이제 돌아오셨어요? 얼마나, 얼마나 님을 기다렸는지 몰라요, 이젠 절 버리고 가지 마세요.}

 

해랑은 그의 아버지를 붙잡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에이그 불쌍한 자식! 왜 진작 그 청년이 마음에 있다고 나한테 이야길 안 했느냐? 응? 에이그…… 나도 그 청년이 마음에 들었는데…….}

 

 {날 버리지 말고 나와 꼭 같이 살아요. 서방님 헤 헤 헤 헤…….}

  

해랑은 실성해 날뛰다가 마을 뒷산 제일 높은 곳에서 한없이 바다를 내려다보다 숨져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해랑이 죽은 뒤부터 안인진에는 큰 변고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니, 고기는 전연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앙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큰 야단은 밤이면 처녀 죽은 귀신인 손각씨가 나타나 동리 총각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이 히히히히……이 히히히…….}

 

 {으악! 귀신이다!}

 

 {이 히히히……도련님! 나하고 혼인하사이다, 이히히…….}

  

많은 총각들은 놀래어 까물어 치거나 도망을 쳐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안인진 마을에 담력이 센 총각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이……히히히히……나와 혼인하사이다.}

 

{네 물러가지 않으면 신묘한 무당을 불러 성황님께 너를 잡아가도록 빌터이다. 썩 물러가거라!}

 

{그렇다면 내 소원을 풀어주오!}

 

{도대체 네 소원이란 무엇이냐!}

 

{나는 시집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은 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원혼이 되었소.}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그러니 내일부터라도 이 마을 높은 곳에다 나를 위하여 사당을 지어주오. 그리고 사당 안에다 남자의 모양을 만들어 주오.}

 

{사당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하필 남자의 모양을?}

 

{그러하오! 그러면 고기도 많이 잡히게 되고 마을도 화평할 것이니, 그럼 부탁드리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나서서 마을 뒤 해랑이 숨진 터에다 해랑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이룩하였다. 이것이 안인진의 해랑당이다. 해랑당에는 해랑의 소원대로 안에다 남자의 모양을 만들어 두었더니, 과연 그 이튿날부터는 해랑의 귀신이 나타나지 아니했고 고기도 잘 잡혔으며 마을도 태평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강릉(江陵)시에서 동쪽으로 한 십리쯤 나가면 안인진(安仁津)이란 어촌이 있고, 이곳 뒷산엔 사당 하나가 있으니 이가 곧 해랑당(海娘堂)이다.

 

 

 

- 고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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