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창주정(滄洲亭)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산 29.
창주(滄州) 정상(鄭詳)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창주정(滄州亭)은 한 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3년 재건하였다.
상(詳ㆍ1533~?)은 자는 중신(仲愼), 호는 창주(滄州)로 식(軾)의 현손이다.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선조 7년(157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남평(南平)ㆍ서천군수(舒川郡守)와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따라 정운(鄭運)ㆍ송희립(宋希立) 등과 함께 종사(從事)하고 한산(閑山)싸움에 병으로 인하여 귀가하여 아들 여린(如麟), 종손(從孫) 란(瀾ㆍ1583~1656)을 시켜 쌀을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군진(軍陣)에 보냈다.
상(詳)의 아들 여린(如麟)은 자는 경후(景厚)로 선조 7년(1574년)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군량을 실어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의 군에 공급하였다.
1594년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을 도와 7명을 참살(斬殺)하고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이원익(李元翼)을 따라 부산(釜山)에서 전공을 세워 승전도(勝戰圖)가 하사(下賜)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살제(廢母殺弟)에 대해 상소하였으며,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전공이 있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에 이르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군량미 48석(石)을 보내고 두 아들을 종군하게 하였으며, 나주(羅州) 설재서원(雪齋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 웹사이트 -
창주정상선생유허비.
滄州(鄭詳先生遺墟碑.
수비과정(竪碑過程) 안내석.
창주정은 시멘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창주정 전경.
창주정 정면.
창주정 현판.
창문틀.
창주정 측면.
창주정 뒷편.
노거수(느티나무)
창주정 앞의 배롱나무.
저 멀리 나주 들녘이 펼쳐져 있다.
201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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