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장군 생가터.
이곳은 김덕령 장군이 살았던 집터로서 사당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충효동 정려비각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다녀온 날: 2019년 7월 28일.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샘길 40.
생가터에는 생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생가터 표지석과 오래된 주택 한 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 :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광주(光州)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 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여러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반란이 진압되자 중도에 회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 구금된후,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義烈祠)에 형 덕홍(德弘). 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으며, 전기(傳記)소설인《김덕령전》이 전하여 온다.
- 웹사이트 -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
생가터 표지석.
광주광역시에서는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고자 경제활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손꼽히는 일대를 일컬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시호인 충장공(忠莊公)의 명칭을 따서 '충장로(忠莊路)'라고 명명을 하였으며, 31향토보병 충장(忠莊)사단도 김덕령의 얼을 이어받아 지방을 사수한다는 기치를 들어서 '충장(忠莊)부대'라고 명명을 하였다.
아울러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송강로 13)에 조성된 '충장사' 경내에는, 그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인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효문, 익호문 등이 있고,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과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사당 뒤쪽 언덕에는 그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유적으로는, '충효동 장군 생가터'와 장군 일가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 旌閭碑閣)'과, 억울하게 숨진 장군의 넋을 달래고자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은 '취가정(醉歌亭)', 장군의 동생인 김덕보(金德譜)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풍암정(楓岩亭)', 장군과 관련된 무기 제조창이었던 '금곡동 제철 유적지(金谷洞製鐵遺跡地)'가 남아있다.
인근의 담양에는 장군의 정경부인인 흥양이씨가 왜군의 추격을 피해 절개를 지키기 위해 투신하였다는 '담양 추월산 보리암 절벽' 등이 있다.
- 웹사이트 -
생가터에 '충효샘길 40'이라는 도로명주소 표지판이 붙어있다.
사당.
(제각으로도 사용하는 것 같다)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임금이 지어 하사한 제문이라 한다.
사당.
문이 잠겨있어 내부는 살필 수가 없었다.
김덕령 장군 생가터에서 바라본 충효동 주차장.
201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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