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장흥. 장흥고씨 봉강사(鳳岡祠)

백산(栢山) 2019. 10. 21. 09:00

 

봉강사 출입문.

 

 

봉강사 외삼문은 2006년 재각 재신축시 외삼문을 설치하지 않고 철제문으로 설치했다 한다.

 

 

 

다녀온 날: 2019년 10월 6일.

 

 

전남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 542-1 (용안로 535-89)

 

 

 

장흥군 모령리 장흥고씨 봉강사(鳳岡祠)

 

 

장흥군 안양면 용안로 535-89, 모령리 봉동(鳳洞 샛골)에는 장흥고씨 소유 봉강사(鳳岡祠)가 위치한다.

 

이곳은 문열공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충의공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 효열공 준봉(준峰) 고종후(高從厚), 호조참의공 기봉(箕峰) 고수위(高守緯), 곡성현감공 문성(文成) 고언장(高彦章)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4년(壬辰) 설단(設壇)하고 陰 9월 15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향사 해왔다.

 

이후 1979년(己未) 후손들의 헌성으로 사당을 신축하여 위패를 봉안하여 오늘에 이른다.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2015년부터 陰 10월 15일 후손들이 제향을 봉행한다.

사당은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삼문(內三門 )이 있다.

 

봉안한 위패(位牌)는 문열공 김천일을 주벽으로 좌측부터 배향되었으며, 이런 형태를 연벽식(連壁式)이라 한다. 본 사당은 액호를 걸지 않고 내삼문에 액호를 걸어 다른 사우(祠宇)와 비교된다.

 

 

 

배향된 다섯 분의 행장을 살펴본다.

 


◆김천일(1537~1593) : 언양人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573년(癸酉) 군기시주부, 1578년(戊寅) 임실현감과 이후 지평과 담양부사, 한성서윤, 수원부사를 지냈다. 1592년 6월 임진왜란 때 고향 나주에서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에게 글을 보내 거의(擧義)하고 의병을 일으켜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8월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江華)로 진을 옮긴 후 연안 각처에 주둔한 왜적을 소탕하고 배를 몰아 양화도에서 대승하였다. 1593년 6월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될 무렵 아들 상건(象乾)과 촉석루 아래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좌찬성, 영의정에 추증되고 나주시 정열사, 진주시 창렬사, 순창군 화산서원, 정읍시 태인 남고서원, 임실군 학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최경회(1532~1593) : 해주人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자는 선우(善遇), 호는 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출신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입격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寧海郡守)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승진했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화순군 포충사, 진주시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고종후(1554~1593) : 장흥人으로 자는 도충(道충), 호는 준봉(준峰), 시호는 효열(孝烈), 공조참의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1570년 진사가 된 후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78년 임피현령을 지냈고 지제교로 선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큰 功을 세웠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다가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의 3부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고 광주광역시 포충사, 진주시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정충단비(旌忠壇碑)를 세우고 정조 1786년(丙午)에 부조(不?)의 전(典)을 내렸다.


 

 

◆고수위(1531~1593) : 장흥人으로 자는 천여(天與) 호는 기봉(箕峰)이다.

명종조 때 사마시에 입격하고 소재(蘇齋) 노수진, 송천(松川) 양응정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백두서인으로 제술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창의사 김천일의 천거로 의병청 향량유사가 되어 각지에서 큰 功을 세웠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 등 여러 장수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고언장(1539~1597) : 장흥人으로 자는 사문(士文), 호는 문성(文成)이다.

정유재란 때 첨정으로 거의(擧義)하고 의병장 최경장(1529~?) 군에 종군하여 유격전술로 전국 각지 전투에서 많은 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훈록 되고 곡성현감에 제수되었다.

 

 

 

봉강사의 강당은 추모재(追慕齋)이다. 1910년(庚戌)에 건축한 묘각으로 농한기에는 후손들의 강학과 종중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건물은 세월이 흘러 노후 되자, 2006년 여러 종친들의 발의로 재각 신축추진위원회(회장 고영찬, 1927년생, 용산면 청전마을 거주)가 구성되었다.

 

 

종유사 고영길(1938~ 2013)의 열성적인 추진과 후손들의 적극적 헌성 참여로 2007년(丁亥) 5월 4칸 건물로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량문(上樑文)은 前 용산면 노인회장을 역임한 안일남(죽산人, 1929~2013, 월림리 태생)이 썼다. 그때 기존의 외삼문(外三門)은 철거하고 신축하지 않아 현재 외삼문이 없으며, 그 자리에 관리사 1동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여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다.

 


- 문헌 출처 / 위씨네 카페 -


 

봉강사 중건기.

 

 

강당: 추모재(追慕齋)

 

 

추모재(追慕齋) 현판.

 

 

봉강사 연혁비.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 6월 29일)에서 왜군에게 성이 함락되자,

서로 껴안고 앙천통곡하며 촉석루 앞 남강물에 투신, 장렬하게 순절하신

문열공 건재 김천일 선생

효열공 준봉 고종후 선생

증호조참의 고수위 선생 등

세 분과 건재 선생의 휘하 좌의장으로 희생되신

충의공 일휴당 최경회 선생

그리고, 정유재란(1597년) 참전 선무원종훈 하신

곡성현감 문성 고언장 선생 등

다섯 분을 설단배향(1954년) 장흥향교에 등록. (음) 9월 15일 향사한다.


                                                                                   - 종문회 -



봉강사 각종 기념비들.

 

 

봉강사 내삼문.

 

 

내삼문에 걸린 봉강사 액호.

 

 

사당: 봉강사(鳳岡祠)

 

내삼문에 액호가 걸린 관계로 사당에는 액호가 걸려있지 않다.

 

 

관리사.



 

201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