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전북 고창. 도암서원(道巖書院)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백산(栢山) 2019. 11. 8. 09:00

 

 

도암서원 홍살문.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2005년 6월 17일 지정.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819-1 (갑촌길 20)

 

 

 

 

도암서원 외삼문.

 

 

도암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향중 유림이 김질(金質, 1496∼1555)의 효성과 학문을 기리어 그가 살던 집터인 영모당(永慕堂)에 사우를 세우고 배향하였는데, 후에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2005년 6월 17일에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었다.

 

1835년(헌종 1)에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킨 증손 은송당(은松堂) 김경철(金景哲)을 추배하였다.

 

1857년(철종 8)에는 김경철의 아우로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현무재(賢武齋) 김익철(金益哲)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암서원 안내문.

 

 

김질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다. 효심이 지극하여 조부모와 양친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상중에 치성을 다하였다. 기대승(奇大升)과 양응정(楊應鼎)이 매번 김질을 추중(推重)하여 "김공을 보지 않았으면 누가 50세에도 부모를 사모했음을 알았으리요. 공(公)같은 분은 진실로 당(堂)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라고 했다. 김질은 4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서 부친상과 조모부상처럼 한결같이 치성을 드렸고, 후에 효자 정려(旌閭)를 받았다.

 

서원 초입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고, 강당인 영모당, 정려각, 김질의 사우인 도암사(道巖祠)가 있다.

 

도암사 뒤 현충문 안에 김질의 6대조인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의 부조묘(不조廟)가 배치되어 있다.

 

향사일은 음력 2월 14일이다

 

 

 

도암서원(道巖書院)

 

영모당(永慕堂)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김질은 조정 및 중국에 잘 알려진 대효(大孝)일 뿐만 아니라 충(忠)을 겸하여 녹권(錄券)을 보관한 봉안각(奉安閣)이 세워졌다.

 

영모당, 정려, 봉안각 모두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는 고창지역에서 유일한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Daum백과]

 

 

 

도암서원 현판.

 

 

 

영모당(永慕堂)

 

도암서원 현판과 같이 걸려있다.

 

 

 

제관실(祭官室)과 유생실(儒生室)

 

 

 

도암서원 묘정비.

 

 

 

효자각.

 

 

 

효자 진사 김질 지려(孝子 進士 金質 之閭)

 

 

 

김씨정려기(金氏旌閭記)

 

 

 

봉안각(奉安閣)

 

 

 

내삼문: 효충문(孝忠門)

 

 

 

도암사(道巖祠)

 

 

 

도암사 현판.

 

 

 

현충문(賢忠門)

익원공 김사형 부조묘 출입문.

 

 

 

현충문 현판.

 

 

 

김사형 부조묘(金士衡 不조廟)

 

 

 

익원공부조묘(翼元公不조廟) 현판.

 

 

김사형(金士衡: 1333~1407)은 고려 후기,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이다. 고조부는 김방경(金方慶)이고, 할아버지는 김영후(金永煦)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김천(金천)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대간을 지내고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랑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이란 작위와 함께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년(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정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지내다가, 1401년(태종 1)에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사형의 후손들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김사형 부조묘를 세워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웹사이트 -

 

 

 

좌정승 익원공 김사형

부조묘 중건기념비.

 

 

 

좌정승 익원공 김사형.

부조묘 이건비.

 

 

 

2019.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