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장흥. 영광김씨 월산재 & 용강사

백산(栢山) 2019. 10. 18. 09:00

 

영광김씨 우수공파종중 용강사 & 월산재 이정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지정: 1984.02.29)

 

다녀온 날: 2019년 10월 6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12 (용안로 307-16)

 

 

 

월산재(月山齋)는 용강사의 강당으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앞의 산이 반월형 같다하여 山은 월산이요. 川은 월내천이라 부르는데서 연유하여 월산재(月山齋), 월내서재 또는 낙영재(樂英齋)라고도 한다.

 

월산재(月山齋)는 용강사의 강당으로 영광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후손들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 순조 4년(1824)에 지은 건물로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당우는 사당인 용강사와 강당인 월산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가장 윗부분에 용강사가 있고 아래로 월산재가 있으며 월산재 앞으로 관리사와 창고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종 19년(1882)에 사림들이 지은 용강사는 나옹 김광범· 우수당 김성범· 죽옹 김정서· 우수 김상범· 학남 김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용강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한편 규모가 큰 편인 월산재는 앞면 6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현재는 강당으로 쓰인다.

 

 

- 우리 지역 문화재 -

 

 

용강사와 월산재 표지석.

 

 

애국지사 김두환 선생 공적비.

 

 

월산재 입구.

 

월산교 안쪽으로 외삼문 부강문이 보인다.

 

 

월산재 연혁비.

 

 

성관(姓貫)은 영광김씨이다.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3세손으로 영광군(靈光君)에 훈봉된 문안(文安) 김심언(?~1018)이다.

 

고려 1014년(현종5) 내사시랑평장사와 서경유수를 역임하였다. 장흥파 1세조는 고려 말 공조전서인 문경(文敬) 김태용이다.

 

3位의 효자는 중시조 문경의 9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하고 뛰어난 재기가 있어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충성심도 남달랐다.

 

8세 때 양친이 중병에 들자 단지주혈(斷指注血)하고 효심이 지극정성, 신인(神人)을 만나 선약을 구하여 드리고 상분(嘗糞)하는 등 지극한 간병을 다하였다. 상(喪)을 당하면 3년 동안 시묘의 정성을 다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에는 병곡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충주까지 출전 평정케 되니 1661년(현종2) 3형제 모두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었다.

 

죽옹 김정서는 태어난 지 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조부 슬하에서 모친 봉양에 효성을 다하여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학남 김정은 일찍 학문에 명성이 높아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일컬어지고 면암 최익현과 도의지교를 맺고 학문과 충절 유풍진작에 힘쓰다가 1910년(庚戌) 국치(國恥)의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 10여일 만에 졸하였다.

 

 

헌성비.

 

 

 

월산재 안내문 & 월산재 내력비.

 

 

외삼문 부강문(扶綱門)

 

부강문은 잠겨있어 담장을 끼고 돌아가니 철제로 된 협문이 있는데 이 협문을 통과하여 월산재로 들어섰다.

 

 

중앙 좌측 처마에는 樂英齋, 우측 처마에 月山齋 액호 편액이 걸려 있다.

 

 

나란히 걸려있는 낙영재와 월산재 편액.

 

우람한 현판으로 '忠孝節義'란 글귀가 크게 걸려 있어 교육관을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다.

 

 

강당 월산재 & 낙영재.

 

 

용강사 내삼문 백원문(百源門)

 

월산재 뒤편에 용강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내삼문인 백원문이 잠겨있어 담장 밖에서 용강사를 촬영하였다.

 

 

담장 밖에서 본 사당 용강사.

 

 

월산재 뒤 좌측에 충효지풍 산고수장(忠孝之風 山高水長)이라 표기된 석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忠孝 집안과 君子나 仁者의 德이 후세에 길이길이 전함을 말한다. 후손의 강학 학훈을 뜻하여 숙연함이 베어난다.

 

 

산정사 표지석.

 

 

우측에는 1897년(丁亥) 김기현이 서재를 하고 있을 때 장흥부사 송기로(은진人 1830~1898)가 수회 내방하여 격려와 산수를 음미하면서 우정의 표지석을 세우고 내방 기념 흔적을 남겼다.

 

 

표지석 유래 안내문.

 

 

월산재는 용강사가 건립된 후로 주로 후손들의 강학과 문중 행사 장소로 이용되었다. 1891년(辛卯)과 1936년(丙子) 중수하였다.

 

1995년(乙亥) 훼손되어가는 유적을 복원 보존코자 정부지원과 문원들의 헌성으로 중수하여 오늘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자문 : 13세손 김기홍(제11대 장흥문화원장, 부산면 내안리 1939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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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