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영암. 덕송재(德送齋)와 덕진교

백산(栢山) 2020. 1. 6. 09:00


영암. 덕송재(德送齋) 전경.


덕송재는 덕진(德津) 여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재각이다.



다녀온 날: 2019년 12월 25일.



전남 영암군 덕진면 덕진리 179-1 (내촌길 15-32)



덕송재(德送齋)



덕진(德津) 여사 추모제를 봉행하는 덕송재는 대지 면적 821㎡[248평], 제각 면적은 75.24㎡[23평]으로,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축복하는 상량문(上樑文)에는 2003년인 단기(檀紀) 4336년 계미(癸未) 4월 19일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중앙 2칸은 제실로, 덕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좌측과 우측 각각 1칸은 제수용품 등을 보관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각 정면에는 예서체(隸書體)로 '덕송재(德送齋)'라고 양각된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있고 약 100여 평[330.59㎡]에 달하는 뜰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덕송재 솟을대문.



덕송재 솟을대문.

인화문(仁化門)



덕진교 유래 안내문.



[덕진교의 덕진 여인 설화]


통일신라 때 덕진이라는 여인이 지금의 영암천변에서 주막집을 운영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강진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로 중 하나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그런데 손님들은 강에 다리가 없어 건너는데 불편을 겪었다. 특히 장마철에는 하천의 강물이 불어나 목숨마저 위협했다. 덕진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다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한 푼 두 푼 땅속 항아리에 묻기 시작하여 300냥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그러나 덕진 여인은 원인 모르는 병에 걸리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영암 원님이 부임해왔다. 첫날 밤, 원님의 꿈에 소복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죽은 덕진 여인이었다. 덕진 여인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묻어놓은 돈 삼백 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날이 밝자 원님은 덕진 여인이 일러준 곳을 파보았다. 과연 삼백 냥이 발견되었다. 원님은 이 돈으로 큰 다리를 놓은 다음 덕진 여인의 이름을 따서 덕진교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덕진 여인의 업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들은 속칭 덕진비를 세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덕송재(德送齋)



덕진루(德津樓)


덕송재 입구가 잠겨있어 바로 옆에 자리한 덕진루에 올라 덕송재를 촬영했다.



덕진루에서 바라본 덕송재.



덕진루에서 바라본 덕송재 솟을대문간.



덕진교(德津橋)



구, 덕진교 옆에 현대식 덕진교가 세워져 있다.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대석교창주덕진지비[일명 '덕진비']는 1813년(순종 13년) 덕진의 공덕을 길이 남기고자 덕진 다리 가까이에 마을 주민들이 세웠다. 외딴곳에 서있는 덕진비를 보존하려고 옛 면사무소 옆으로 이전하였으나, 비(碑)는 본래의 위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1983년 5월 5일 덕진비 이설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어 본래의 위치로 옮겨 세웠고 1992년 1월에는 비(碑)의 마모와 훼손을 막고자 비각을 세웠다.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비각.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비문.



덕진공원.



덕진의 주막.                       해신제.


덕진공원에 벽화로 덕진 여인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태수와 덕진의 만남.              덕진의 죽음.



태수의 꿈.                   약속의 덕진교.



201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