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전북 정읍. 창동서원(滄東書院) 문화재 자료 제78호.

백산(栢山) 2020. 3. 27. 09:00

 

 

 

창동서원(滄東書院) 전경.

 

 

문화재 자료 제78호.
(1984.04.01)

 

관리자(관리단체) 부안김씨 종중.

 

 

 

다녀온 날: 2019년 11월 10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 창골길 38-27 (창동리)

 

 

 

 

 창동서원 안내문.

 

 

창동서원(滄東書院)은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965년에 지역 유림들이 세워 오늘에 이른다.

 

김택술은 간재 전우(田愚)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근세의 학사로 도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일제시대에는 철저한 배일사상으로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원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와 강당, 직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후창집의 사본과 석판본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다.

 

 

 

외삼문. 집의문(集義門)

 

 

 

 집의문(集義門)

 

 

 

창동서원 묘정비와 내삼문.

 

 

 

창동서원 사당.

 

 

김택술(金澤述)의 본관은 부안(扶安).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 아버지는 김낙진(金洛進)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로 최석홍(崔錫洪)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 : 마을서당)에서 수학을 시작해, 15세 경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900년 전우(田愚)에게 사사 받아 학문의 대도를 배웠는데, 이때 '후창'이라는 호(號)를 받고, 창동처사(滄東處士)라 하였다.

 

32세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죽었을 때, 3년 간 시묘(侍墓)해 포로고행(圃老高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 꾸짖으며 물리침)했고, 또 큰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광복 후 전우의 문집 수정본을 발간하였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은 받지 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하였다.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해 일생의 고절(高節)을 수립하고, 후학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전우의 수재로서 일시의 사표로 칭송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공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하였는데,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창집(後滄集)』이 있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불망실(不忘室)

 

 

 

불망실기(不忘室記)

 

 

 

 양호재(養浩齋)(左)       &     낙요당(樂要堂)(右)

 

 

 

낙요당(樂要堂)

 

 

 

양호재(養浩齋)

 

 

 

2019.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