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여흥민씨 사충문 비각.
*주소: 전남 해남군 해남읍 구교리 372-2 (서림공원 내)
여흥민씨 사충문(四忠門)은 1452년(단종 즉위) 이조판서로 재임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순절한 충정공 민신(閔伸)과 그의 아들 민보창(閔甫昌), 민보해(閔甫諧), 민보석(閔甫釋)의 충절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정려(旌閭)이다.
*해남에서 여흥민씨 사적은 사충문 이외에도 여흥민씨 부조묘를 비롯하여 미산서원(충정사)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여흥민씨 부조묘.
(향토문화유적 제2호)
전남 해남군 마산면 은적사길 183-2 (장촌리 415)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소재하고 있는 여흥민씨 부조묘에는 민신(閔伸), 민보창(閔甫昌), 민보해(閔甫諧), 민보석(閔甫釋)등 여흥민씨 4부자가 배향되어 있다.
여흥민씨 부조묘는 순조22년(1822)에 명부조를 받았으며 해남읍 수성리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 당하였고 1940년에 마산면 장촌리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산서원(眉山書阮) (충정사)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 578-5번지 (수성3길 25-13)
창건연도: 1781년(정조 5), 향사일: 음력 8월 5일.
1452년(단종 즉위) 이조판서로 재임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순절한 충정공 민신(閔伸)과 그의 아들 민보창(閔甫昌), 민보해(閔甫諧), 민보석(閔甫釋)의 충절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부친은 당시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한 왕권을 찬탈 음모를 꿈꾸던 세력들로부터 수 차례 회유와 압력을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특히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병(病)을 핑계로 반역에 동참하지 않고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현릉(문종릉) 비석소(碑石所)에서 역사(役事)를 감독하던 중, 단종 원년 계유(1453년 10월 10일) 삼군진무 서조(徐遭)에게 무참히 피살되었다.
그는 후손 민치상이 올린 상소문에 의해 1781년(정조 5년) 329년 만에 복관 된 후 1782년(정조 6년)에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87년(정조 11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81년(정조 5년) 후손 민치상이 임금께 올린 상소문에 의해 329년 만에 신원이 회복됨과 동시에 전남 해남군 마산면 양지리에 충정사(忠貞祠)를 창건하여 배향하여 오다, 1800년(정조 24년) 충정사를 전남 해남군 해남읍 해리 577번지로 이건하여 신실, 동재, 서재, 내,외삼문을 증축함과 동시에 미산서원(眉山書院)이라 개칭(改稱)하여 충신 4부자를 향사하였다.
미산서원지를 비롯하여 정조임금이 내리 민신의 '충정공' 시호 및 '영의정' 추증 교지, 심원록 등이 있다.
여흥민씨 사충정려기적비.
여흥민씨 사충정려 안내문.
여흥민씨 사충문 현판.
충정공 민신지문.
충정공 민신지문 편액.
충신 민보해지문.
충신 민보해지문 편액.
충신 민보창지문.
충신 민보석지문.
충신 민보창지문 편액과 충신 민보석지문 편액.
충신고이조판서 민공정려기(上)
이조판서증영의정. 민충정공정려중창기(下)
열녀 여흥민씨 정려사적비(좌)와 열녀 무안박씨 정려사적비(우) 비각.
열녀 무안박씨지려 현판.
민씨정려 중수기.
시문 현판.
여흥민씨 사충문과 열녀 무안박씨 정려각의 모습.
2020.09.27.
'발길을 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남 해남. 해촌서원(海村書院) (0) | 2021.01.29 |
---|---|
전남 해남. 여흥민씨 사우. 미산서원(충정사) (0) | 2021.01.25 |
전남 해남. 명품 막걸리 해창주조장. (0) | 2021.01.20 |
전남 영암. 회사정과 문곡선생 영암체거유허비 (0) | 2021.01.13 |
전남 영암. 원풍정과 김병교 영세불망비 (0) | 2021.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