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북 부안. 석정문학관(夕汀文學館)

백산(栢山) 2022. 10. 10. 06:11

석정문학관(夕汀文學館)

 

 

*주소: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110 (선은리 547-1)

 

 

필자가 이곳을 1차로 들렸을 때는 2021년 5월 23일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런데 점심시간이라서 근무자들이 부재 중으로 문이 잠겨있어 매우 아쉽지만 바로 앞에 자리한 신석정 고택만을 촬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정보가 부족하여 지난 번에 빠트린 매창테마관과 이중선 묘소를 촬영하기 위해 부안을 다시 찾게 되어 이번(2022.09.11)에 2차로 들린 것이다.

 

 

 

신석정은 누구인가.

 

夕汀 신석정.

 

슬픈 牧歌속에 산 사색의 일생.

흙에 살다 흙에 묻은 孤高抒情...

 

19071974. 본명은 석정(錫正), 관향은 영월(寧越)이다. 아호는 석정(夕汀·釋靜·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호성(胡星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구한말 간재 전우 아래에서 유학을 닦으신 신기온(辛基溫) 선생과 부덕겸비한 이윤옥(李允玉) 여사의 차남으로 190777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망국의 한에 젖으신 선생은 명리보다 시문의 길을 걸었다. 1924朝鮮을 비롯 東亞, 中央의 지상에 시를 발표하였다. 1926萬頃密陽人 박소정(朴小汀) 규수와 성례를 올렸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 박한영(朴漢永) 문하에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 원선(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여년 끝에 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귀향 1933청구원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빈한과 인고의 삶에서도 여러 곳에서 찾아오는 시우들과 문학으로 위안을 삼으셨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시인.

한평생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지조 지켜...

 

1939년 첫 시집 촛불이 상재되자 김기림은 시문학사에 휘황한 횃불을 밝혀든 목가시인이라 말하였다. 겨레의 향수를 노래한 목가로서 독자들의 공감대 또한 드넓었다.

 

광복후에도 선생은 고향을 떠나지 않으셨다. 시창작과 후생교육으로 일관했다. 6·25사변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4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시문학지에 시 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747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 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렇게 일생을 오로지 시 창작에만 몰두한 시인은 흔치 않다. 설령 오랜 문단 활동을 지속했다 해도 끝내는 이를 발판으로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일생을 교육계에 종사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조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삶을 마감했다.

 

회고컨대 선생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를 꾸려야 할 직장도 버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어서,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문으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 차라리 푸른 대로 살기 위하여 아예 붓을 꺾었다.

 

선생은 이 반세기 동안 초지일관 지조를 지켰지만 일언지하에 이름 지을 수 있는 시 세계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자연의 세계에서 꿈꾸는가 하면 삶의 현장에서 신음소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시문학사는 첫 시집인 촛불에서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의 울부짖음은 잊고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속삭임만을 기억하여, 선생의 시세계를 목가시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안에 유폐시켜 놓았다. 그렇지만 그 꿈의 속삭임조차도 일상의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을 먼 나라에 설정한 아이러니이어서 그 먼 나라가 부재하는 현실을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30년대를 관통한 한국시단의 巨星.

격동의 현대사를 고고한 抒情으로 꽃피워...

 

사실 선생의 시 정신은 평생을 관통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생활과 시를 하나로 보았다. 생활에서 시를 찾고 시에서 생활을 찾았다. 생활에서 시를 찾을 때 친자연적인 목가시인이 되고, 시에서 생활을 찾을 때 시대적인 참여 시인이 되었다. 시는 시적이고 생활은 생활적이다.

 

이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선생의 시세계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변증법적으로 정과 반과 합을 통하여 진보 발전을 거듭하는 참다운 시정신인 것이다.

 

선생은 단지 시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선생은 한시에서 시적 감성을 길어 올려 시 창작의 에너지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한시도 번역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한시 번역서가 없을 때 선생이 번역한 한시는 교과서다운 역할을 당당했다. 또 향리 출신인 이매창의 시를 번역하여 지방의 천민 시인으로 잊혀진 그녀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새로 부각시켰다.

 

선생은 때로는 논설과 수필로 자신과 이웃과 국가와 자연이 가지는 당위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이성과 감성을 통하여 여과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기와 기행, 그리고 편지와 전기 등 다양한 장르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노출시켜 사회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습작 투고기에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선생은 시론을 직접 집필하여 이를 대학에서 강의하고 이에 입각하여 각종 현상모집에서 작품을 심사하고, 이러한 詩論으로 많은 후학들의 시집이나 저서에 서문을 얹어 그들을 지도 편달하고 고무시켰다. 또 문예지의 추천위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시인들을 문단에 등용시켰다.

 

19731221일 전북문화상 심사 도중 뇌혈전증으로 졸도한 석정은 200일이란 기나긴 시간을 병상에 투병했으나 1974년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에서 향년 예순여덟으로 일기를 마치셨다.

 

1939년 처녀시집 촛불을 시작으로 1947년 제2시집 슬픈목가, 1956년 제3시집 빙하, 1967년 제4시집 산의 서곡, 그리고 1970년 제5시집 대바람 소리등 한국시단에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 석정문학관 홈페이지 -

 

석정문학관.

 

관람시간.

-하계(3월~10월) 09:00~18:00

-동계(11월~2월) 09:00~17:00

*점심시간: 12:00~13: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월요일이 공휴일 또는 연휴일 경우 연휴 다음날 휴관)

 

신석정 문학관 데스크.

 

신석정 좌우명.

지재고 산유수.

 

신석정 연보 및 신석정 가계보.

 

신석정의 지인관계.

 

은사 이익상 선생.

선배 박용철, 김기림, 정지용 시인.

 

석정 작품 연보.

 

석정문학관 진열품목.

 

집필하는 신석정 선생.

 

문학관 내부.

 

시 정신과 참여의 방향.

 

 

석정의 작품과 소장품들.

 

님께서 부르시면 & 등고.

 

전북대학교보에 실린 석정의  4.19 혁명에 부치는 노래.

 

지인들과 주고 받은 서신들.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석정의 각종 서책 알림판.

 

각종 문예지에 실린 석정의 소식.

 

신동아 문예지에 실린 석정의 작품.

 

가람 이병기의 서찰 내용.

 

마명 정우홍의 서찰.

 

김상옥 시인의 편지.

 

재단법인 부안군 문화재단 알림판에 석정 생전의 동향을 알리고 있다.

 

문학관 2층 휴게실.

 

석정 서책을 진열해둔 책장.

 

석정 망중한.

 

교사 재직 시 제자들과 함께.

 

제자 김종원의 기증실.

 

 

 

 

*다녀온 날: 2022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