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

전남 나주. 함평이씨. 소요정(逍遙亭) & 충열각(忠烈閣)

백산(栢山) 2023. 10. 16. 05:00

소요정(逍遙亭)
 
함평이씨 정자.
 

*소재지: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324.
 
 

함평이씨 이종인(李宗仁 1458~1533)이 초동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면서 지금 이곳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자손을 낳아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다.
 
이종인(李宗仁)은 마을 안쪽에 자리한 장춘정(藏春亭)의 유충정(柳忠貞: 1509∼1574)의 외할아버지로서 고봉 기대승, 눌재 박상 등과 교류하였으며 영산강의 죽포나루 권역을 중심으로 장춘정과 소요정이 교류공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함평이씨 대동보에 의하면 이종인(李宗仁)의 자는 선지(善之)이고, 호는 소요(逍遙)로 1494년(성종 25년) 무과에 급제하여 1496년(연산군 2년) 대마도치위사장정의 통사관이 되고 이후 함경도우후 만포진첨사, 경상우수사, 전라우수사, 부총관, 함경도북병사, 장흥부사 등을 거쳐 1522년 추자도에 왜변이 있을 때 전라도좌수사가 되어 왜병을 격퇴시킨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요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가 1533년(중종 28)에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자는 수 차례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오다가 1865년(고종 2)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정자 안에는 기정진(奇正鎭)장헌주(張憲周)가 쓴 「소요정중수기逍遙亭重修記」가 있고, 기대승(奇大升), 박상(朴祥), 김선(金璇), 임제(林悌), 임억령(林億齡), 박창수(朴昌壽), 이탁헌(李鐸憲), 백광훈(白光勳), 이민유(李敏裕), 이돈면(李敦冕), 이용헌(李龍憲), 이돈화(李敦華), 기학경(奇學敬), 이원서(李源緖), 이장헌(李璋憲), 이돈룡(李敦龍)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후손들의 시(詩)가 있습니다.
 
이후 이종인(李宗仁)의 손자였던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 1523~1546)은 1523년 나주 초동(草洞) 마을에서 태어나 1561년 문과에 급제하고 당시 동향선배인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사림영수(士林領袖)가 되어 송강(松江) 정철(鄭徹)과 같이 이끌어 벼슬이 예조정랑(禮曹正郞)에서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서장관(書狀官, 외교사절)으로 북경에 다녀온 후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다 1573년 대구부사(大邱府使)가 되어 선정을 베푸니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이 높았으나 조정에서 당쟁이 심해 향리로 돌아와서 소요정(逍遙亭)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 고봉 기대승,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등 제현들과 세상을 등지고 종유(從遊)했다.
 
박개(朴漑: 1511~1586)가 이유근(李惟謹)이 택가의 서당에 이르러 시를 보내며 초청하기에 가서 이렇게 회답하며 시(大均到擇可書堂 以詩見邀 往奉和呈)를 남겼다.
 
관련유적으로 소요정 뒷뜰에 충열각(忠烈閣)이 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옥사한 후 숙종조에 충신으로 추증된 증형조판서 이지효와 이억종의 처 진주강씨를 모신 충열각(忠烈閣)이 있습니다. 
 
 
- 웹사이트 -

 
 

소요정 대문간.
 
 

소요정 전경.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정면을 유리창으로 장식해 두었다.
 
 

소요정 현판.
 
 

소요정 대청.
 
 

 
 

 
 

 
 

소요정.
 
 

측면에서 바라본 소요정.
 
정자 전체를 유리창으로 장식해두니 일반적인 정자 맛이 감소된다.
 
 
 

 
*아래는 충열각(忠烈閣)에 대한 내용입니다.
 

소요정에서 나와 충열각(忠烈閣)으로 오르는 돌계단.
 
 
함평이씨 이지효(李止孝) 정려각.
 
 
*소재지: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324.
(소요정 뒷편에 자리하고 있음)
 
 

충열각함평이씨 이지효(李止孝)의 정려각으로 본관은 함평(咸平).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사간 이유근(李惟謹)이다. 문예와 사장이 뛰어났으며, 선전·도총·경력을 거쳐 보령·박천·창성 등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이지효는 1603년(선조 36)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1604년 구성부사, 1606년에는 만포진첨절제사로 나가 야인을 안무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충청도수군절도사에 특진되고, 1613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유폐론이 일어났을 때 이에 반대하였다.
 
이 해(1613년)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충청병사로 있으면서 칠서(七庶: 칠서의 옥을 일으킨 일곱 사람의 서자)들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되어 문초를 받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이때 그의 아들 이선철(李先哲)도 삭탈관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형조판서로 추증 되었으며, 숙종 때 정려가 내려졌다.
 
충열각함평이씨 이종인소요정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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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각(忠烈閣)
 
 

충열각(忠烈閣) 현판.
 
 

이씨 충열문 중수기.
 
 

충신 증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행 가선대부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지효지문 계사 오월일.
 
 

열녀 학생 이덕종 처 유인 진주 정씨지려 영묘무인 명정려.
 
 

충열각.
 
 

충열각 앞에는 이종인의 소요정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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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