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탐방

전남 함평. 함평이씨. 월산사(月山祠) 함평군 제1호 향토문화유산

백산(栢山) 2023. 11. 3. 05:00

월산사(月山祠)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칠실 이덕일 장군을 제향하는 사우.

 

 

 

함평군 제1호 향토문화유산

(2020,11,27)

 

 

 

*주소: 전남 함평군 대동면 학동로 438-13.

 

 

 

함평군 제1호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동면 월산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칠실 이덕일 장군을 제향하는 곳이다.

 

1712(숙종 38) 이덕일의 사당이 대동면 학동마을에 건립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당 1동과 서재, 강당, 유허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월산사함평이씨 17칠실 이덕일 장군(손무 현감공파)을 제향(祭享)하는 사우입니다.

 

이덕일 장군께서는 1594년 무과에 급제 후 귀향하여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향군을 모아 곳곳에서 왜군을 맞아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하여 이순신 장군이덕일 장군과 전술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산으로는 1732년 간행된 이덕일 장군의 유고인 칠실유고필사본(충남대 도서관 소장)이 있으며, 칠실유고집에 실린 우국가(憂國歌) 28은 역사적 의미와 국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월산사 외삼문.

 

*문이 잠겨 있어 외부에서 촬영함.

 

 

 

월산사 외삼문.

 

 

 

외삼문 옆에 세워진 함평 월산사와 유허비 안내판.

 

 

이덕일(李德一) 장군은 어릴 때부터 글을 닦았으나,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피난민을 모집하여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산에 거점을 두고 싸워 전과를 많이 올리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덕일을 불러 일을 함께 논의한 바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성을 쌓아 적을 제압할 방책을 논하여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뒤에 통제영의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610(광해군 2)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사관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의금부의 탄핵으로 삭직당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우국가(憂國歌)28수를 지어 당시 국정에 대하여 충분(忠憤)한 심정을 읊었다. 우국가가 학자에 따라 당쟁상심가(黨爭傷心歌)또는 당쟁비가(黨爭悲歌)라고도 불리며, 국가의 안위를 비분강개하여 읊고 있어 우국만을 주제로 한 시조작품으로는 가장 많은 수의 것이 된다.

 

당대의 세력가 유희분(柳希奮)의 매부였으나 중앙정국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함평의 월산사(月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칠실유고21책이 있다.

 

 

 

월산사 양선생 유허비.

 

월산사 외삼문 옆에 <월산사 양선생 유허> 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양선생(兩先生)이란 충무공 이순신 장군칠실 이덕일 장군을 지칭한 듯한데, 장군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선생이라고 칭하며 새기었다.

 

 

 

서재인듯 하다.

 

 

 

강당으로 쓰인듯 하다.

 

 

 

 

 

 

 

 

내삼문과 칠실 이덕일 장군의 '칠실우국가28장비'가 보인다.

 

 

 

칠실우국28장비(漆室憂國二十八章碑)

 

 

칠실 이덕일 장군(漆室 李德一 將軍)

漆室 李德一 장군은 本貫이 咸平으로 字는 敬而, 號는 漆室, 孫茂縣監公派 7世孫이시다.

 

1561(명종 16년) ~ 1622(광해군 14년)

 

1592년: (宣祖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護國의 意志로 馳馬검술 및 兵書공부함.
1594년: 무과급제 後 귀향.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부근 읍(邑)의 피난인 數千 名과 고산골(대동면 향교리)에 들어가 隊伍整備와 동시에 戰鬪훈련함.
- 동막동에서 倭軍과 接戰하여 승리로 敵이 완패하고 도주함.
- 이순신 장군이 이덕일 장군의 영성(英聲)을 듣고 국사(國士)로 초치하여 戰勝할 方案을 論議함.
1600년: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됨.
1601년: 부호군 첨지중추부사 영위관(副護軍 僉知中樞府事 迎慰官)
1603년: 부친상(父親喪)으로 3년 服입음.
1610년: (光海君 3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됨.
1611년: 통제영우후(統制營虞候)
1613년: 金悌男 謀反이란 구실로 參判公從遂의 후손 이지효. 이선철 등과 의금부에 投獄됨. 그 후 獄에서 풀려 歸鄕 後 小屋 한間을 築造하여 漆室이라 하고 永住하시고
1622년: 우국가 28章을 창작영가(創作歌詠)하시다가 永眠하심.


 

- 함평이씨 종중보감에서 -

 

 

 

 

 

 

내삼문과 월산사(月山祠)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월산사를 지키고 있다.

 

 

 

 

 

*2023년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