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6

전남 영암. 김해김씨. 구고사(九皐祠) 김완장군 부조묘.

김해김씨. 구고사(九皐祠) 김완장군 부조묘. 전라남도 기념물 제49호. (1981.10.20 지정) *소재지: 전남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59-4 (화소길 20) 김완장군의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아버지는 이성현감 극조(克祧)이다. ​ ​ 김완장군 부조묘와 구고사는 조선 중기의 무신 양무공 김완(1577∼1635) 장군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구고사는 그 영정(지방유형문화재 제65호)을 모신 건물이며, 부조묘는 김완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며 장군이 죽은 후에 왕명으로 세워졌는데 불에 타 1979년에 복원하였다. 이 두 건물이 모두 정면 3간, 측면 1간,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태이다. 초창은 김완장군이 서거한 13년(1635년)에 왕명으로 창건(創建)했는데, ..

문화재 탐방 2021.11.01

전북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塚) 문화재지정 사적 제272호.

만인의총(萬人義塚) 정문. 문화재지정 사적 제272호. ▶소재지: 전북 남원시 만인로3 (향교동 636)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 점령의 실패가 임진왜란의 패인이라 판단한 왜적은 11만 대군으로 1597년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하여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 5만6천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1천 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 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문화재 탐방 2021.05.21

전북 남원. 충렬사(忠烈祠)

남원. 충렬사(南原. 忠烈祠)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506-1 (만인로 89) 남원 충렬사(南原 忠烈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병사 이복남, 접반사 정기원, 남원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노 4충신을 봉안한 사당으로 1612년에 건립되었다. 이어 별장 신호, 통판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3충신이 추가되었고 1653년(효종 4)에는 충렬사가 사액 사당이 되었다. 남원 충렬사가 남원 용성관 동쪽에서 1675년 만인의총 근처로 이전하면서 방어사 오응정을 추가하여 위패는 8충신이 되었다. 그리고,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879년(고종 16)에 다시 단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후 해방 이후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1979년에는 현 위치에 50분의 위패를 봉안하였..

발길을 따라 2021.05.19

전남 강진. 장수황씨. 양건당 충효사적비와 의마총

양건당 황대중 충효사적비. 주변 환경이 볼상 사납게 되어있다. ▶소재지: 전남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436-5. 장수황씨 양건당공 휘대중충효사적비. 長水黃氏 兩蹇堂公 諱大中忠孝史蹟碑. 양건당(兩蹇堂)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은 양정공 황사효(黃事孝)의 증손이며, 황윤정(黃允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효건(孝蹇)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성장해서는 참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사로 뽑혀 전투에 참여했으며, 병사 황진(黃進, 1550~1593)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이 함락될 때 성을 빠져나온 그는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이순신의 진중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총탄이 오른쪽 다리를..

발길을 따라 2021.04.05

전남 해남. 정유재란 만의지사 만의총(萬義塚)

해남 옥천 만의총(萬義塚) 전라남도 기념물 제248호 *소재지: 전남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500-1 일원. 옥천면 성산대교들에 자리하고 있는 만의총(萬義塚)은 본래는 삼국시대 지방 호족의 묘역이었다. 이곳에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성산대교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3만 명의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한 1만 명의 의병과 백성들의 시신을 묻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성산대교들 전투를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해 전투의 실상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전투가 벌어진 시점은 명량해전(1597. 09. 16.) 직전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정유년..

발길을 따라 2021.02.22